다음 여정을 위한 이정표
오늘, 사직서를 썼다. 인생에서 두 번째다. 처음보다 익숙할 줄 알았는데, 막상 문서를 완성하고 나니 마음이 이상하다. 텅 빈 것도, 가득 찬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무는 느낌. 무언가를 끝내는 일은 언제나 어색하다.
예전 첫 퇴사 때는 그런 감정이 유난히 짙었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옆으로 빠져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조금은 허무하고, 외로웠다. 소속감을 잃는다는 감정은 생각보다 깊게 파고드는 법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다르다. 외롭지 않다. 허무하지도 않다. 그게 이번 퇴사를 조금 특별하게 만든다.
나는 이 회사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20대 중반에 입사해,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말이 회사지, 사실은 내 청춘의 대부분이 담긴 공간이다. 매일의 출근과 퇴근 사이에서 나는 나를 조금씩 만들어갔다.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사람과 일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 돌이켜보면 여기서 배운 것들은 단순한 업무 스킬보다도 살아가는 방식, 고민하는 태도, 그리고 나 자신을 대하는 관점 같은 것들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이 회사를 다니며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이 회사를 선택했던 이유였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시작할 때마다 체력적으로는 벅찼지만, 그 과정이 지루하진 않았다. 오히려 고객과 함께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시간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덩치 큰 문제를 마주하고, 방향을 찾아가고, 답을 도출해 내는 일련의 흐름은 내게 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퀴즈처럼 느껴졌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매일 ‘출근’을 하는 게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는 환경’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지금 돌아봐도 꽤 큰 행운이었다.
물론 모든 순간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때로는 흔들렸고, 지쳤고, 기대만큼의 결과가 따라오지 않아 낙담도 했다. 어떤 날은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가, 빨리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스치듯 지나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감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조금 더 생각하려 했다.
일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복의 연속이고, 감정의 소모와 일정 시기 이후에는 지루함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어떤 자산에 내재된 체계적 위험처럼, 이런 감정들은 어떤 회사를 가든 완전히 피할 수 없는 요소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의 피로와 불만은 일의 구조 속에 원래 존재하는 것이라 받아들이려 했다. 직장생활에서 70%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나머지 30%의 부족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불만의 근원이 될 때에도, 조금은 내 감정을 내려두는 방식으로 버텼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환경이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나를 조직에서 더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
회사를 떠나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감사하다’는 마음이다. 내가 이 조직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회사는 나에게 과분할 만큼 많은 기회를 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입사할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보낸 시간들은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내가 바라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면, 첫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점. 두 번째는 그 일을 열심히 할 때 조직 내에서 인정받고, 충분한 리소스를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세 번째는, 함께 일하는 상사와 후배들과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는 마지막까지도 내가 조직을 떠나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이 조건들이 운 좋게도 모두 충족되어 있었다. 객관적으로 회사와 환경이 뛰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는 그렇다.
이번 주, 퇴사를 앞두고 본부장님과 식사를 했다. 평소 퇴사자와 따로 자리를 만드는 일이 거의 없는 분이기에 그 자리 자체로 뜻밖이었다. 본부장님은 말수가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항상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모습이 익숙했던 터라, 이 자리만큼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조용했고, 대화도 단정했다. 그런데 식사의 마지막 즈음, 본부장님이 말을 꺼냈다. 더 다양하고 성공적인 업무 기회를 주지 못한 점이 미안하다고 말하셨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에게 이 조직에서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점,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진심이다.
이번 사직서는 무언가를 도망치듯 내려놓는 일이 아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끝내는 것도 아니다. 첫 직장에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나를 진지하게 바라봐주던 팀장님과 본부장님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직장에서도 또다시 대학원이라는 방향을 선택한 나를 기꺼이 응원해 주는 상무님, 본부장님, 그리고 팀원들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응원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담대하게,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지구과학을 좋아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대학생 때는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정년퇴직을 하는 삶을 막연히 상상하던,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나에게는 늘 과분하고 감사한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