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하루는 갑자기 온다

그저 그런 하루를 멈춰 세운 전화

by 유지경성

방금 전, 오랜만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이 전화는 방금 전까지의 내 기분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전화에 이름이 뜨자마자 반가움이 먼저 밀려왔고,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나와 함께 프로젝트를 열정적으로 이끌었던 한 대표님이었다.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작된 그 인연은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1년에 한두 번씩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어져 왔다. 대표님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나눈 건 작년 여름이었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안부를 나누고, 웃으며 헤어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오늘 다시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고 처음엔 여느 안부 인사처럼 반가운 말들이 오갔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 근황을 이야기했다. 곧 유학을 떠나게 됐다고, 영국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그 말에 대표님은 한참을 듣고 계시더니, 조심스럽게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작년 여름,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그 직후, 암 진단을 받았다고. 그리고 얼마 전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디가 아프셨냐고 묻기도 전에, 대표님은 덧붙였다. 병상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고, ‘지금 나에게 꼭 연락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가며 리스트를 만들었다고. 그리고 그 리스트에 내 이름이 있었다고. 꼭 한 번 연락하고 싶었다고, 꼭 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감사한 마음보다 먼저, 그간 몰랐던 시간의 무게가 나를 덮쳤다. 대표님이 얼마나 큰 싸움을 혼자 견뎌왔을지, 그 과정에서 누구를 떠올렸을지, 그리고 그 ‘떠오른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나는 큰 병을 앓은 경험은 없지만, 예전 질병이 의심되던 시절 몇 달간을 병원과 검진 사이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시기엔 모든 게 불확실했고, 내가 평범하게 살아온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던 기억이 있다. 대표님께 그 이야기를 전하며, 내가 그때 얼마나 인생을 다르게 보게 됐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전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통화 전 아까까지는 그저 그런 하루였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하루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누군가의 진심이 나를 찾아온 날이고, 그 진심 앞에 내가 조금은 더 겸손해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지나간 고통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런던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많은 약속과 준비들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 어떤 약속보다도, 대표님과의 만남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출국 하루 전, 일정을 비우고 대표님과 만나기로 했다. 마지막 날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쓰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진심일 때, 말은 길어진다. 말이 길어지는 이유는 불안해서가 아니라, 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표님의 말이 길었던 오늘, 나는 그 길어진 말속에서 진심을 보았고, 그 안에 나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공부를 그만하고 잔잔한 책을 읽고 싶은 하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