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학일지

런던생활을 시작하며

by 유지경성

이제 막 정착 중인 런던에서의 삶을 조금씩 기록해보려 한다. 해외에 와서 좋은 점은 무엇보다도 ‘고립’이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하루 종일 울리던 이메일에서 해방되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던 고객사의 연락에서도 벗어났다. 여기에 더해, 영국 휴대폰을 쓰니 연락이 닿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덕분에 오롯이 나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런던에서 살았던 것이 2014년쯤이니, 어느새 1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걸 즐기면서도, 익숙한 곳을 마음속 안식처처럼 간직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런던에서 살았던 시기 이후에도 거의 매년 한 번씩은 이곳을 찾았고, 덕분에 마음의 거리감이 거의 없다. 미국 유학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이번 유학의 가장 큰 목적은 나를 돌아보는 것이었기에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내게 편안함을 주는 환경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입국하자마자 느껴지는 이 도시의 편안함은 나에게는 분명한 장점이다.


이번 대학원 생활의 출발점인 숙소는, 치열하게 알아보고 담당자에게 집요하게 부탁한 끝에 꽤 넓은 기숙사로 배정받았다. 다만 기숙사 오픈이 9월 중순이라, 그전까지는 학교 근처의 임시 거처에서 지내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다. 2014년에는 Abbey Road, 그러니까 비틀즈 앨범 재킷으로 유명한 그 거리에 살았는데, 이번에 구한 임시 거처 역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와 가까운 학교에 입학하고, 다시 그 근처에서 살게 된 건 우연이라기보다 묘한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의 도시는 재개발과 재건축이 활발해, 몇 년만 지나도 건물과 지형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 반면 런던의 10년은 그렇게 빠르지 않다. 수백 년 된 건물이 많아, 예전에 다니던 가게나 건물이 그대로인 경우가 흔하다. 이번에도 학교 주변과 거주지를 걸어 다니다 보니, 예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많았다. 덕분에 구글 지도를 켜지 않아도 발길 닿는 대로 걸을 수 있고, 길을 잃을 걱정이 없다.


이렇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런던에서 하는 일이라곤 테니스뿐이다. 밥 먹고 운동만 하다 보니, 마치 테니스 유학을 온 것 같다. "공부는 대체 언제 하려나…" 싶은 날들이 이어진다.


아직 런던에서 보낸 시간은 길지 않지만, 유학생활을 하며 느끼는 점들과 사진들을 조금 정리하고자 한다.


임시 거주지


예전에 영국에서 거주할 때는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인종적·문화적 배경이 달라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음식 문제에서는 향이나 조리 방식이 서로 신경 쓰이는 경우가 잦아 함께 지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삶의 패턴까지 다르면 그 불편함은 더 커진다. 특히나, 나는 일찍 자고 새벽부터 무언가 시작하는 얼리버드형이라서 늦게 자는 사람과 패턴이 안 맞으면 내 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 생활패턴을 최대한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혼자 살기로 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아파트 환경과는 사뭇 달라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나에게 맞춰진 한국의 집과 달리, 이곳에서는 세입자의 입장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하니 불편함이 적지 않다. 그래도 가능한 한 내 생활에 맞게 최적화하며 지내고 있다. 사진으로 보면 나름 안락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한국에서 느끼던 평온함과는 또 다른 결이 있다.




학교의 첫 이미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학교 행사에 참석했다. 사실 이 학교는 입학을 결정하기 전 몇 년 동안 종종 들르곤 했었다. 나는 무언가를 살 때, ‘사야지’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사기보다 가게에 가서 여러 번 들여다보는 편이다. 몇 번씩 보고 나서도 ‘정말 필요하다’는 확신이 드는 시점에야 비로소 산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입학을 고민할 때 특별히 무언가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에 올 때면 런던에 들러 캠퍼스를 산책하며 분위기를 느껴보곤 했다. 덕분에 지금 학교 전경은 처음 온 곳이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장소처럼 낯설지 않다.


학교 행사에서는 맥주 한 잔을 들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전형적인 서양식 네트워킹 자리가 마련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향한 곳이었기에 처음에 낯선 곳에 가서 대화하기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본래 한두 사람과 깊게 대화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얇고 넓은 식의 네트워킹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물론 이런 다수의 자리에서도 대화를 이어갈 수는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파티나 모임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학원 동기들이지만 대부분 20대 중반의 젊은 친구들이 목표를 향해 출발하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좋은 기운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참가자들이 Finance 관련 다양한 포지션에서 왔기 때문에 서로의 커리어 관점과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점은 장점으로 느껴진다.




공원의 접근성


런던에 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첫날 학교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마트를 다녀온 것 외에는 사실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이 남산타워에 잘 가지 않듯, 빅벤이나 타워브리지 같은 관광지는 이미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나는 도시보다 자연을 더 좋아한다. 학교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형 공원인 리젠트파크가 바로 앞에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국의 7월과 8월은 ‘천국 같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날씨가 좋다. 그래서 런던에 도착한 뒤 시차 적응도 할 겸 매일같이 공원을 걸었다. 리젠트파크의 자연은 새벽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지루할 틈이 없다. 가끔은 풀밭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예전에는 이 나라의 자연은 그냥 ‘주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 조깅을 하다 보면, 이렇게 넓고 큰 공원도 사람들이 부지런히 손질하며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곳의 풍경도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리젠트 공원에는 큰 호수가 있다. 거위나 오리 등 다양한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새벽에 조깅을 하는데 어떤 어린 학생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낚시가 이런 공원 호수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는데 무언고 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한테 이 친구가 다가와서 자기가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인증숏을 찍어달라고 한다.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알겠다고 해서 결국 인증샷의 작가가 되기도 했다. 자신도 이게 잘못된 일인 줄은 아는지, 물고기를 잡은 뒤에 다시 같은 자리에 방생해주기는 하였다. 물고기는 뭘 먹고 자랐는지 정말 크긴 했다...



테니스


영국에 도착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테니스 인프라가 정말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자연 공간을 잘 보존하는 것과 더불어 시내 곳곳에 코트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예약 경쟁은 한국처럼 치열하지만, 나는 학생이라 한가한 시간대를 활용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흥미로운 점은 테니스 고수들이 많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초보자도 꽤 있다는 것이다. 종주국이라면 모두가 수준급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는 실력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좋은 파트너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학생 할인이다. 코트 이용료를 비롯해 여러 혜택이 있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니스장에서 생수 한 병이 6천 원, 코트 대여료가 최소 시간당 5만 원이라고 생각하면 영국의 물가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하게 된다. 영국에 와서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생활비다. 이런 것을 고려해서 예상보다 넉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의 생활비와 물가 수준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테니스를 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일종의 네트워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다양한 사람을 두루 만나는 것보다, 나와 실력이 비슷한 상대를 만나 꾸준히 함께 치는 것을 선호한다. 테니스를 하다 보면 의외로 사람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게임을 운영하는 방식, 약속을 잡고 지키는 태도, 정해진 시간 안에서 경기를 성실히 임하는 모습 등에서 그 사람의 습관과 성격이 드러난다.


나는 필요한 시점에 적절한 사람과 만나는 것에 꽤나 운이 좋은 편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영국의 테니스 매칭 앱을 통해 한 명과 매칭이 됐다. 말없이 1시간 동안 인텐스한 게임을 하고, 남은 시간에 이야기를 나눠보니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러시아인이었다. 마침 내가 영국 법학에도 관심이 있던 터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조만간 좋은 테니스 메이트를 만나 다시 새벽 테니스 루틴을 만들고, 생활의 활력을 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 하나의 목표


유학을 오면서, 나의 가장 큰 이유는 지식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삶을 돌보는 일이었다. ‘성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양적인 확장보다는 질적인 방향성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 시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더 배우고, 어떤 명성을 더 얻느냐보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렇지만 지내오던 관성과 같이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도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사실 재무석사 과정(Master in Finance)은 나에게 낯선 길이 아니다. 그동안 해온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과목 하나하나가 주는 신선함보다는 익숙함이 더 크다.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심리적 부담이 적다는 점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배움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내게 "여유롭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시간을 온전히 보내는 것이 진짜 여유다. 그래서 학교에서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읽고, 배우고 싶은 공부를 하는 시간은 나에게 가장 사치스러운 여유이자 충만한 순간이다.


그 연장선에서, 영국에 온 뒤 도전하기로 한 것이 있다. 바로 법학학사 과정(LLB, Bachelor of Laws)을 졸업자 전형(Graduate Entry)으로 이수하는 것이다. M&A를 하다 보면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사업에 대한 이해, 거래를 주관할 자문 역량, 재무·회계적 전문성에 더해 반드시 필요한 한 축이 바로 법률 지식이다. 나는 이미 사업, 자문, 재무·회계 영역에서 경험을 쌓아왔다. 이제 법률이라는 마지막 축을 채운다면, 앞으로 나의 지식적 기반은 훨씬 단단해질 것이다. 다행히, 런던연합대학 과정에서 동시에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꽤나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학기 중에 시간이 많이 부족해질 것으로 생각이 되기도 한다.


아마 많은 학생들은 취업이 목표이기에 이곳에서 취업 준비로 바쁘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취업준비에는 큰 관심이 없다. 좋은 직장을 얻는 그 과정을 목표로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애초에 이 2년을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스스로 성장시키는 데 쓸 것이라 목표했기에 그에 맞는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서 얻은 나만의 콘텐츠를 바탕으로, 다시 시장으로 나가보려고 한다. 취업 준비에는 정보력이나 네트워킹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국 스스로가 가진 콘텐츠가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믿는다. 이 결과가 어떻든, 내가 잘 보낸 의미 있는 2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는 의미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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