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며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by 유지경성

오늘은 오전부터 조금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영국회계사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는데, 역시나 해외에서 보는 시험은 생소하다. 9시에 시작하는 시험이니 적당히 9시까지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오산이었다. 조금 불안해서 7시부터 공지사항과 이메일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입실을 8시까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우버를 타고 부랴부랴 도착했다. 그런데 시험을 치르려면 DOCKET이라는 문서가 필요했고, 그마저도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감독관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서 자필로 서류를 작성한 뒤에야 겨우 시험을 칠 수 있었다. 해외에서 이런 종류의 시험을 보는 것에 대한 감각도 없고, 누군가 미리 알려주는 것도 아니기에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 것 같다.


작년부터 수업에 투입하는 시간을 줄이면서, 런던대학교의 법학 수업과 영국회계사 공부,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가치투자를 위해 꾸준히 종목을 살피는 것이 내 거의 대부분의 일상이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자격 공부를 굳이 해야 하나 싶었는데, 유학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느낀 것이 있다. 나는 여행이나 술자리,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거의 고문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게 바쁘게만 살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지 다른 나라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즐거워하거나, 반복되는 일상을 소비하는 방식에 나 스스로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반면에 책을 보며 다른 투자자들의 철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 부족한 지식을 채워가는 것, 저평가된 사업이나 주식을 분석하며 다양한 산업을 들여다보는 것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진다. 무엇이 더 좋고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내가 재미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영국회계사 시험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다. 1월부터 3월까지 수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여행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보다는 커리어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도움이 될지를 고민한 결과였다. 물론 이 라이센스를 최종적으로 취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취득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내 생활 패턴 안에서 조금 더 구조화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가까운 목적이다. 어떤 자격증의 취득보다도, 호기심이 가는 것을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전 3시간의 시험을 마치고, 지금은 공항에 와 있다.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잠시 다녀오게 되었다. 앞으로 2~3주 정도는 학업과 조금 떨어져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커리어와 관련해 고민 중인 부분에 대해 조언을 줄 수 있는 동료와 지인들을 만나보려 한다.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은 만큼 일정이 꽤 촘촘하게 잡혀 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많은 친구들을 전부 볼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커리어 측면에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만남에 조금 더 무게를 두려고 한다. 내가 어떤 국가에서 커리어를 이어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답에 가까워지려면 현장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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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ames's Park, London


나는 항상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조언해 줄 선배들이 주변에 있고, 비슷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 진지하게 들을 만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이 그 길과 맞고 어떤 부분이 다른지를 객관적으로 비춰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까운 곳에서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자산이다.


자신의 주변 환경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것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다.


어려서부터 가족에게 노출되며 받은 영향은, 의식하든 못하든 지금 나의 생각과 의사결정에 깊이 녹아 있다. 주변에 어떤 친구가 있느냐에 따라 현재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방향을 바라보는지도 달라진다. 연인이 주는 것이 편안함인지 피로함인지에 따라 삶을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에너지를 소모당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사람과 어떤 환경 속에 나를 둘 것인지는 스스로가 신중해야 한다. 물론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 주변도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친구의 측면에서는 예전에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어릴 적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친구가 곧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거나, 만난 지 10년이 되었다거나 하는 이유로 친한 친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버핏과 멍거의 우정처럼, 진짜 깊은 관계를 만들려면 후천적으로 사람의 결이 비슷한 사람과 만나는 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대학을 나와서 친한 것도 아니고, 같은 고향이라 친한 것도 아닌, 조금 더 후천적인 영역에서 비슷한 결을 가지고, 비슷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KakaoTalk_20260302_174306089_02.jpg The Green Park, London


연인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Spouse라는 표현은 라틴어에 근간을 둔 말로, 책임 있는 후원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최종 지점은, 서로가 좋아서 당장 죽을 것 같은 에로스적 사랑의 반복이 아니다. 에로스의 사랑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책임 있는 후원자가 되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방향이 비슷해야 하고, 삶의 무게를 느끼는 정도도 어느 정도 유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1의 어려움에도 늘 힘들 수 있고, 누군가는 10의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감도를 가지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에로스의 사랑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어떤 환경에 두느냐도 중요하다. 나태해질 수 있는 환경에 스스로를 놓아두면서 성실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 확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다. 개인의 의지가 아주 대단하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의지보다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조금 더 고되고 긴장감 있는 환경에 두면서, 성장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나에게 하고 있는 몇 가지 중 하나다.


특히 유학이라는 것은 금전적으로, 생활의 질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분에서 고통을 준다. 누가 금전적 지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유학 생활에서 겪는 불필요한 이동, 타국에서의 감정 소모, 취업난 등 굳이 안 겪어도 될 일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나이에 이런 상황에 나를 넣는 것은, 아직은 스스로가 멈출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3월의 영국, 그리고 한국. 두 나라 모두 이제 봄으로 진입하는 시기다. 오늘 시험을 마치고 Green Park와 St. James's Park를 천천히 걸어봤다. 시험이 끝난 직후의 묘한 해방감 때문인지, 평소에도 좋아하던 이 길이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뭇가지 끝에 맺히기 시작한 연한 초록, 벤치에 앉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새소리. 런던에 살면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공원을 걸으며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도시가 내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기도 하다.


7개월 만에 방문하는 한국이 기대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립고 기대되는 것은 한국이라는 장소 자체라기보다 한국에 두고 온 나의 감정들, 그리고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익숙한 편안함이 아닐까 싶다. 오래 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그 자연스러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공기 같은 것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작년 런던에 다시 돌아와 7개월 동안 이곳에서 만들어 온 나름의 편안함과 따스함도 떠오른다. 돌아보면 런던에서도 나는 무언가를 쌓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이 도시에서, 어느새 나만의 루틴이 생기고, 익숙한 산책길이 생기고, 이 도시에서 겪는 경험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감각이 생겼다. 꽤 다양한 도시들을 방문했지만, 런던에는 나에게 조금의 정(情)과 같은 것들이 생기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3월에 만나게 될 여러 이야기들이 기대되면서도, 이번 달만큼은 나 스스로에게 조금 여유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KakaoTalk_20260302_174306089_01.jpg The Green Park,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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