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담자는 상담자에게 ‘화’ 내지 못할까?

제14화

by 그래도

1. 상담실에서 내담자가 화를 내는 장면은 의외로 드뭅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표정이나 어투에서 서운함이나 분노의 기미를 느낄 때가 있지만, 그 감정이 그대로 터져 나오진 않습니다. 화는 목구멍에서 멈추고, 돌려 말해지거나 삼켜져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2. 분노는 관계의 힘을 시험하는 감정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담자에게 상담자는 부모 같기도, 선생님 같기도 하며, 때로는 유일하게 기대고 싶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대상에게 화를 낸다는 건 곧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어린 시절 “화를 내면 버려졌다”는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내담자는 화를 표현하지 못한 채 움츠러듭니다.


3. 많은 내담자는 상담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화난 내 모습을 드러내면 상담자가 힘들어할 것 같고,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착하고 협조적인 내담자’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화를 낸다는 건 그 이미지를 깨뜨리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4. 어떤 내담자에게 화는 여전히 ‘위험한 감정’입니다.

어릴 적 화를 냈을 때 돌아온 건 무시, 더 큰 처벌, 혹은 관계의 단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자 앞에서도 화는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분노가 치밀어도 목구멍에서 멈추고 맙니다.


5. 한 내담자는 상담자가 약속 시간을 조금 조정해 달라고 했을 때 순간 불쾌감이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오히려 “괜찮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 뒤에서야 조심스레 “사실은 그때 속으로 화가 났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웃는 듯하면서도 눈치를 살폈고, 상담자는 잠시 멈춘 뒤 “그런 마음이 있었군요”라고 받아주었습니다.

내담자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고, 그제야 처음으로 “상담자에게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험해 본 셈이었습니다.


6.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순간, 상담은 더 깊어집니다.

상담자가 그 화를 방어하지 않고 버텨줄 때, 내담자는 “내 분노도 관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구나”라는 경험을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내 화도 견뎌질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을 맛봅니다.


7. 하지만 모든 상담자가 이 화를 잘 견디는 것은 아닙니다.

상담자가 당황해 방어적으로 설명하거나, 분노를 잘못된 반응처럼 돌려버린다면, 내담자는 다시 “내 화는 위험하다”는 옛 믿음을 확인할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신뢰는 쉽게 흔들립니다.


8. 사실 내담자가 삼킨 화 뒤에는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화를 억누른다는 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려는 또 다른 몸부림일 수도 있습니다.


9. 그래서 내담자가 화를 내지 못하는 건 단순한 억압이 아닙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동시에 위태롭게 느껴진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화가 나오느냐가 아니라, 왜 삼켜졌는가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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