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실망하고 싶은 날

by 그리고


아이가 조금 자랐나 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잘 못 불던 풍선을 이제 곧잘 불어낸다.
칭찬을 했더니, 더 큰 풍선을 불겠다고 애를 쓴다.
그러다 한껏 부푼 풍선이 터져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져 씩씩거리며 터진 풍선 조각을 내던졌다.
"실망이야."

내가 불고 있던 풍선에도 더 힘껏 바람을 불어넣어 터뜨려버렸다. 그리고 아이의 말을 따라 말했다.
"실망이네."
화가 난 아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진다.
나의 육아도 아이만큼 조금 자란 것 같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풍선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주말 오후. 유난히 아이의 '실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나에게도 터질 듯한 풍선처럼 큰 꿈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의 깊고 뜨거운 이면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작가를 꿈꾸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열망을 불어넣었던 시절.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팽팽해진 풍선이 터져 버릴까 두려워졌다. ​결국 공공기관 취업이라는 견고하고 안전한 문을 열었다. 정해진 루틴 안에서 돌아가는 예측 가능한 일상들은 나름의 평온과 소박한 행복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해 상처받지 않으려,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적당히 부풀리다 만 나의 꿈들은 바닥에 나뒹군다. ​낭만이 거세된 자리에 남은 그 미완의 풍선이 문득 발끝에 채일 때면 한 번도 온전히 부풀려 터트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가슴을 친다.


아이의 순수하고 무모한 기대가 울컥할 만큼 부러운 날이다. 언젠가 내 삶도 한 번쯤 펑하고 터트려 보고 싶다.
그리고 지독하게 실망해보고 싶다.

마음 한구석에 실바람이 인다.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가슴 벅찬 기대를 품게 하는 불씨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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