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수 있는 권리
프롬프트 창에 ‘줄 위를 걷는 사람’이라고 입력하면
몇 초도 안 되어 영상 하나가 뚝딱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발을 헛디딜까 두려워하는 미세한 떨림도,
긴장된 호흡도 없다. AI가 구현하는 세상은 완벽하다.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 오류가 삭제된 세계는 잠시 눈을 즐겁게 할지언정, 결코 우리에게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며칠 전 싱가포르에서 태양의 서커스 <쿠자(KOOZA)>를 봤다. 상상한 것은 무엇이든 AI가 빚어내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가장 투박하고도 원초적인 쇼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무대 위 아티스트들의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외줄 위에서 도약하는 이의 발목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숨을 멈췄다.
그 찰나의 정적 이후 퍼포먼스에 성공했을 때 공연장이 떠나갈 듯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물론 예전에도 서커스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AI가 만들어내는 영상에 체할 것 같은 이 시대에 다시 마주한 서커스의 감동은 이전의 이상이었다.
내가 감동한 지점은 아티스트의 매끄러운 진행과 쇼의 성공이 아니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실패 앞에 맨몸으로 선 아티스트들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울 때, 그것은 단순한 곡예를 넘어선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것에 대해 도전하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투쟁이었다.
계산된 수치나 알고리즘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오직 수만 번의 추락과 부서질 듯한 의지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역설적으로 경건하고 감동적이다.
서커스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싱가포르의 눅진한 밤공기가 깊숙이 밀려들었다.
환상에서 깬 듯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내 안에는 아티스트들이 남긴 뜨거운 맥박이 진동하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AI가 만든 매끄러운 결과물들로 덮여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AI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위대한 무기.
그것은 바로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AI는 실패하면 사용자가 줄어들지만, 인간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하는 그 행위에 박수받는다.
나는 다시 삶의 외줄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딘다.
이 위태로운 흔들림이야말로, AI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고귀한 생의 증명임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