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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Aug 29. 2015

우연성과 인권 2

열망으로서의 인권 ③

왜 하필 나만 이렇게 태어났을까

우리는 지난번 ‘잘못된 삶’ 소송을 다루었다(열망으로서의 인권 ①을 보라). 장애아를 제거하지 못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부모와 장애아 자신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는 장애를 의도적으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 레즈비언 부부가 존재한다. 이는 단지 더 '심한' 장애와 '덜 심한' 장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부모들의 선택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두 부모 모두 어떤 류의 자녀를 ‘선택’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한쪽은 다운증후군을 갖지 않은 자녀를 선택하기를 원했고, 다른 쪽은 청각장애를 가진 자녀를 선택하기 원했다. 유전공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앞으로 선택 가능한 요소들은 더 많아지고 정교해질 것이다(갈색머리, 180이상의 키, 수학적 사고력, 어법에 맞게 발언할 수 있는 능력?)


영화 가타카(Gattca, 1997)는 완벽한 유전자 선택이 가능해진 사회에서 '자연적으로' 태어난 주인공 빈센트(에단 호크)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 조차 디자인 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여전히 삶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우연’들을 경험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조건들은 무작위적인 자연의 제비뽑기에 의해 결정된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일 역시 추첨의 결과다. 우연히 발생한 사태에는 법적 책임을 물을 대상도 없고, 분노할 상대방도 없다. "하나님 왜 하필 나만 이렇게 태어난거죠! 왜 우리집은 이렇게 가난한거죠! " 백만번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토할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힌다. 


내 장애를 인식했던 날을 기억한다. 어린 아기의 상태를 벗어나 점차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흐릿했던 시야 속에 분명하게 이해되는 차이들이 들어왔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양팔을 휘저으며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신체의 격차였다. ‘왜 하필 나만 이렇게 된거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 맞는 대답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 내가 장애를 가진 데에 누구의 책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점차 장애를 가진 나의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갔다. 내 장애가 산부인과의사의 실수때문이거나 우리 부모님이 장애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면, 나는 이들에게 소송을 걸거나 분노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을지 모른다. 나아가 나의 부모와 산부인과 의사만이 내 장애에 책임을 질 사람들일 뿐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내 장애를 있는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연한 삶과 인권

  

우리 모두는 특정한 피부색, 키, 부유하거나 가난한 부모, 성별, 성정체성, 장애를 가졌거나 가지지 않은 채로 태어나 살아간다. 많은 경우 이런 조건들은 변화시키기 어렵고, 어떤 경우 변화시키는 것이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치료되지 않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애아동들이 희망없는 재활치료에 늪에 빠지는가. 흑인으로 사는 것이 싫다고 피부색을 바꿀 도리도 없다. 열심히 일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가난속에 허덕이는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 빈곤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조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 조건 하에서도 풍성한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스스로의 조건을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적, 사회적 조건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삶의 '우연성'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자연의 제비뽑기에 의해 결정된 조건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므로, 각자의 조건들을 이유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최소한의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자는 합의가 가능해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하고 기본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관념은 어떤 위대한 책이나 인간, 또는 신으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다. 인권은 오로지 우리 서로에 의지하여 성립할 뿐이다. 우연히 맞딱드리게 된 우리 각자의 삶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우리 모두의 집단적이고 위대한 '정신승리'가 곧 인권의 근거이다.  

 

잘못된 삶 소송은 어떠한 상태로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 결국 세상에 태어난 이상, 서로의 삶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우리 서로간의 합의에 균열을 낸다. 한편,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일 역시,  '잘못된 삶' 소송과 반대로 장애를 긍정적인 인간적 속성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우연히 우리에게 태어난 아이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존엄성을 부여하자는 합의를 소홀히 한다는 점에서는 잘못된 삶 소송과 다르지 않다. 


(물론 아이의 양육이라는 현실적인 측면, 장애를 문화의 일부로 볼 수 있는지 여부 등, 이 주제는 복잡한 철학적, 법적 쟁점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 모든 측면을 다루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장애아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제기한 '잘못된 삶' 소송("나를 태어나게 만든 손해를 배상하시오!")에 대해 우리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원고는 자신이 출생하지 않았어야 함에도 장애를 가지고 출생한 것이 손해라는 점도...[주장하고 있으나],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그 가치의 무한함(헌법 제10조)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인간 또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존재가 타인에 대하여 자신의 출생을 막아 줄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고, 장애를 갖고 출생한 것 자체를 인공임신중절로 출생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서 법률적으로 손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따라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대법원 1999. 6. 11. 96나 4187.)


 위 결론에 동의할 수 있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위 결론에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 본다면, 장애를 가진 원고에게 당신의 삶은 손해가 아니며, 여전히 존엄하다는 '아름다운 말잔치' 만을 하였을 뿐 약간의 손해배상마저 받지 못하게 것은 아닐까? 이 혼란이 정리되는 시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뿐이다. "원고 당신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우연하게' 얻게 된 그 장애를 가진 삶은,  결코 손해가 아니며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는 점을 우리 사회는 앞으로 입증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회일까. 그 사람의 잘못과 아무런 상관없이 우연히 발생한 사태들을 의연하게 맞설 수 있도록 돕는 사회일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과연 그러한 인간이기는 한가.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이 점을 검토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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