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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Sep 28. 2015

난쟁이 던지기를 금지하는 이유

열망으로서의 인권 ④

난쟁이 던지기           


건장한 남성들이 ‘난쟁이’라 불리는, 저신장장애를 가진 사람(Dwarfism)을 힘껏 매트리스 위로 집어 던진다. 키가 작은 그는 온몸에 헬멧을 쓰고 보호대를 착용한 채 멀리 날아가 고꾸라진다. 멀리 잘 날리면 승리한다. 이 게임은 일종의 <스포츠>로 여겨지는데, 미국만이 아니라 서구의 여러 국가에서 유행했다. 현재는 프랑스, 독일, 미국의 몇몇 주에서 법으로 금지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종종 행해진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995년 ‘핍쇼(peep show)’를 둘러싸고 재판이 벌어졌다. 핍쇼는 무대 위에 있는 여성의 나체를 남성들이 작은 공간 안에 들어가 관찰하는 쇼다.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핍쇼에서 성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형식상 어떤 강제도 동원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여성에 대한 존엄성을 해하므로 독일 정부가 이를 금지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재판의 쟁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핍쇼나 난쟁이 던지기처럼,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재산적, 물리적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에도 이를 금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논란 속에 진행된 서울광장의 퀴어퍼레이드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나 도덕감에 근거해서, 퀴어퍼레이드가 비록 주변의 누군가에게 물리적 해악을 끼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사회의 ‘건전한 도덕’을 위협하며, 퍼레이드에 참가한 몇몇 사람들의 옷차림은 ‘일반인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퀴어퍼레이드, 핍쇼, 난쟁이 던지기를 우리들의 건전한 도덕감을 위해 금지시켜야 하는 것일까?

<왕좌의 게임> 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남자 피터 딘클리지(티리온 라니스터 역)도 저신장장애를 가지고 있다.  


핍쇼와 스트립쇼          


1995년 독일 행정법원은 핍쇼를 금지한 주정부의 행위가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이유로 이를 금지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법원은 전통적인 스트립쇼는 핍쇼와 달리 법으로 금지할 수 없다면서 핍쇼와 스트립쇼를 구별했다. 스트립쇼 역시 여성이 알몸을 드러내며, 이를 돈을 주고 즐기는 행위다. 이 역시 어떤 사람들에게는 핍쇼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건전한 도덕’에 반하는 게 아닌가? 왜 스트립쇼와 핍쇼를 차별한 것일까.      


법원의 논거는 다음과 같았다. 스트립쇼를 연기하는 여성은 무대를 돌아다닐 수 있고, 관객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관객 전체와 관계하면서 자신의 몸을 주도적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녀가 일종의 생생한 인간성을 지닌다. 반면 핍쇼에서 여성은 관객과 눈을 마주칠 수 없고, 관객의 얼굴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관객에게 철저히 ‘보이기만’ 하기 때문에, 존엄성의 훼손 정도가 크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스트립쇼이든 핍쇼이든 남성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둘 모두 여성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저와 같은 구별이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우리가 인간 존엄성의 훼손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법이 보호해야 할 영역이 무엇인지에 있다. 독일 법원이 위와 같은 구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척도는 건전한 도덕에 부합하는지와는 상관이 없으며, 어떤 인간이 대상이나 물건, 단순한 수단이 아닌 주체적이고 생생한 존재로서 드러나는지 여부라는 점이다.   

        

착하지만 존엄하지 않은 것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당시 장애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IMF 금융위기였던 시기였고, 나의 부모님은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그러했듯 극도의 경제적 곤란상태에 빠졌다. 특수학교의 생활관 비를 내기 어려웠고 용돈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당시 한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월 10여 만원 정도의 후원금을 내게 주기로 결정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그 돈을 받아 책을 사고 간식을 사먹고 친구들과 외출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 모임 나와  어머니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있는 한 회의실로 초청했다. 우리는  시간을 맞춰 그날 여의도로 향했다. 고마운 분들에게 직접 만나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모임에는 국회의원은 물론 제약협회 회장, 금융 관련 일을 하는 사업가 등 쟁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본건 나도 어머니도 처음인 일이었고 국회의사당의 건물은 부담스럽게 웅장했다. 음식이 나오고, 이들은 각자 자기 소개를 하면서 나의 어머니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어머니는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고 인사했다. 나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눈이 부리부리한 중학생이었지만, 어쨌든 어머니가 나를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임은 식사를 다 할 때까지 1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는데, 모임에서는 당시 금융위기에 대한 이야기, 그 국회의원이 당적을 옮긴 것에 대한 이야기 등이 나왔다. 서로를 칭찬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나누었다.  그동안 나와 어머니는 그저 밥을 먹을 뿐이었다. 우리는 잘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들이었고, 그들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장애학생의 삶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휠체어를 타고 그 모임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후원금을 통해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는 악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품위가 있었고 선량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나와 나의 어머니는 그 모임 내내 철저히 전시되었으며 그 날의 기억은 지금도 마음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모임은 어떤 사람들의 선량한 도덕감도 해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행정법원의 판례를 상기하라. 이 모임은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여성과, 장애를 가진 그 여성의 아들이 가진 존엄성을 훼손했는가?      


인권 감수성은 도덕적 선량함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스트립쇼 역시 도덕적으로 문란한 행위라고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배우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진심으로 자율적으로 참가했으며, 탁월한 움직임으로 무대를 장악한다면 그의 존엄성은 훼손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장애아동을 돕고자 하는 선량한 모임에서라도, 그 모임에서 철저히  도움받는 사람들을 전시하고, 그들을 수동적인 동정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이곳에서 존엄성은 훼손될 수 있다. 인권과 도덕은 동일하지 않다. 인권은 다수자의 도덕성으로 보장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 저 아래에 놓여있는 자존감을 보호한다.           


난쟁이 던지기, 핍쇼, 퀴어퍼레이드, 어느 것은 허용할 수 있고 어느 것은 금지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자. 이 모든 행위들이 누군가를 억지로 참가시키거나,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 재산적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를 금지시킬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도덕감이나 불쾌감은 우리 각자의 경험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그 행위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물건이자, 대상, 철저한 타자로서 그저 전시되고 있는지 여부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인권은 당신의 도덕감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멸시당하지 않을 권리를 철저하게 보호한다.     



 * 참고문헌: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앤드류 솔로몬 『부모와 다른 아이들1』, 민음사, 2015.            

페터 비에리, 『삶의 격』은행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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