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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세계여행 Nov 25. 2019

인도 사막에서 폭풍우를 만나다 (하)

사막에서 수재민이 되다

라이킷과 구독, 그리고 댓글을 부탁드려요! 독자와의 만남이 작가에겐 가장 큰 행복입니다.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greeda/33)


 0.

 잠에서 깼다. 얼굴에 차가운게 느껴졌다. 비다.
 비라고? 여기 사막 아니야?


5.
 친구들도 잠에서 깼다. 사막에 온게 이번이 두번째인데, 올때마다 비를 맞는다니 팔자 한번 기구하다. (첫번째는 몽골의 미니 고비사막이다. 폭우에 게르가 침수됐었다.) 아직 잠이 덜깨서 방수 바람막이랑 우산을 썼다. 그런데 심상치 않다. 먼 하늘에서 금요일 밤의 홍대클럽마냥 불빛이 번쩍번쩍 하는게 보인다. 처음에 한두 방울이던 빗줄기도 점차 굵어진다. 비가 더 심해지면 어떡하지? 대피해야되나? 근데 어디로 대피해? 반경 5km 이내엔 어떤 사람도 없고 비를 피할만한 나무도 없다.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에서 뛰어서 도망칠 수도 없고, 이제 와서 낙타를 타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미처 벗어나기 전에 폭풍우에 붙잡힐 거다.

 수반이 긴급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른다.
 "얘들아, 얼른 이쪽으로 침대 옮겨!"
 이전엔 침대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폈는데, 주변에 있는 나무 근처로 일제히 침대를 옮겼다. 혹시라도 번개가 쳤을때 나무가 대신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수반이 낙타 짐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이리와! 이거 같이 옮겨야 돼!"
 짙은 색깔의 방수포였다. 공사장에서 보이는 파란색 플라스틱 천막이라고 하면 뭔지 알거다. 가져와서 침대위에 덮었다.
 "들어가있어!"
 멀어보였던 번개와 비바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게 보인다. 처음 잠에서 깼을땐 헛웃음이었는데 이젠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다. 수반의 말에 따라 후다닥 방수포 밑으로 들어갔다. 비는 이미 가랑비 수준을 넘었다. 방수포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ASMR이다.

 "핸드폰 꺼! 몸에 금속으로 되어있는거 있으면
 다 빼서 침대 밑에다 놔!
잘못하면 번개맞을 수도 있어!
방수포 날아가지 않게 꼭 붙잡아!"


 비행기 탈때도 안내방송은 팝송가사 마냥 흘려들었는데, 이때만큼은 수능 영어듣기보다 집중했다. 금속이 뭐가 있나 더듬거려보니 윗도리의 지퍼가 금속이다. 잽싸게 벗어던졌다. 방수포를 잡으라는 수반의 말은 'Hold onto plastic'이었다. 방수포의 재질이 플라스틱이라 그렇게 말한건데, 난 말그대로 플라스틱으로 된 무언가를 잡으라는 소리인줄 알았다. 순간 이해는 안갔지만 '플라스틱이 절연체라 그런가?'라는 생각으로 온밤 내내 플라스틱 생수병을 끌어안았다. (문과라 부끄럽다.)

내가 보던 풍경이 진짜 이랬다.

 이내 폭우가 쏟아진다. 여느 비오는 날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풍이 상륙하는 날에 경험했던 수준이다. 장대비가 방수포를 강타하는게 몸으로 느껴졌다. 20초에 한번씩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는다. 돌풍에 방수포가 들썩인다. 혹시라도 날아갈까봐 헤어지자는 연인보다도 더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헤어진다고 죽는건 아니지만 이건 진짜 죽는다. 해가 뜰때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남았다. 사막은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해가 지면 모래가 금방 식는다. 그만큼 공기도 차갑다. 방수포가 날아가면 번개는 둘째치고 저체온증으로 죽는다.

 원없이 ASMR을 듣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여기가 열대우림도 아니고 사막인데 도대체 무슨 꼴인지. 아무리 인도여행이 사건사고가 많다고 해도 이것까진 예상못했다. 사기꾼 조심, 먹는물 조심, 원숭이 조심까진 들었는데 사막에서 번개조심하란 소리까진 못 들었는데. 어릴적 교과서보다도 자주 복습했던 학습만화 '사막에서 살아남기'에서도 폭풍우 조심하란 말은 없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여행경비 아끼지 말고 펑펑 쓰고 다닐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랬을까. 죽을때 죽더라도 그럴싸하게 죽어야 되는데,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사막에서 비맞아서 죽는거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야. 몇일 뒤 신문 한구석에 실릴 단문 기사가 상상된다.

 '20대 배낭여행객, 인도 사막에서 비맞아 숨져'


 안타깝기보다 황당하잖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내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 깨달았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뭣 때문에 이러고 다니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여행을 계속하자니 크게 감흥이 없는 딜레마다. 하지만 번개소리를 들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애초에 오는게 아니었어'가 아니라 '아직 못 가본 데가 많은데, 여행만큼은 끝내고 싶은데'였다. '내 선택에 후회를 하고 있진 않구나' 싶어 다행이었다.

 폭풍우는 밤 내내 계속됐다. 비가 잠깐 멎어 지나갔나 싶으면 또 방수포를 두드려 날 깨웠다. 잠을 깰 때마다 눈앞이 칠흑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날아갔구나. 방수포에 물이 고여 몸을 짓누르면 팔다리를 뻗어 밀어냈다. 그런 뒤에 잘 고정되어있나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몇번씩 반복하며 아침해를 볼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6.
 "얘들아, 일어나!"
 수반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떴는데 어두컴컴하다. 빗소리는 안들리는데, 또 뭐가 터졌나? 아 방수포 때문이구나. 빗물 때문에 무거워진 방수포를 걷어냈다. 아침이 됐다. 비록 여전히 구름이 껴있어 대낮처럼 밝진 않지만 해가 떴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생존자들끼리 난민캠프에서 얼싸안고 감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사막의 난민캠프. 바닥을 보면 모래의 색깔이 다르다.
생존자 인증샷

 "어제 진짜 방수포 날아가서 죽는줄 알았잖아. 그렇게 바람이 불었는데 안 날아간게 용하다."
 "수반이 밤새 침대 다리로 고정하더라고."
 "아, 진짜? 수반, 잠 제대로 못잔거 아냐? 너무 고생했겠다."
 "뭘, 그게 내가 할 일이잖아. 관광객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지."
 이 원론적인 말에 정말 감동받았다. 그동안 관광객만 보면 어떻게든 뜯어먹으려던 사람들만 보다가 참된 가이드를 만나니 눈물겹다.
 "이제 아침 만들거야.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해야돼. 원래는 천천히 가는데, 구름 보이지? 또 비가 올 수도 있으니까 빨리 빠져야 돼."
 "알았어. 도와줄거 있어?"
 "없어. 주변 구경하고 내가 부르면 오면 돼."
 사막의 마지막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지만 그런거 없다. 간단하게 주변을 걸으면서 친구들끼리 사진을 찍었다. 구름이 많아 우중충하니 사진은 안 나오고, 밤새 내린 비로 모래는 단단하게 뭉쳐있다. 달리면 발바닥이 아플 지경이다. 여러모로 내가 꿈꿔온 사막과는 다르다.

저녁 아니고 아침 여덟시에 찍은 사진

 아침은 간단하게 짜이, 삶은 달걀, 토스트다. 먹기 시작하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진다. 어제처럼 폭우가 될까봐 대충 먹고 짐을 쌌다. 수반이 혹시 낙타를 타고 나갈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밤새 비를 맞은 낙타들도 그렇고 잠을 제대로 못잔 수반을 생각해 가까운 곳에서 차를 타기로 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짐을 다 싸자마자 출발했다. 10분 정도를 걸으니 지프차가 우릴 기다린다. 헤어질 시간이다.

가려는데 그새 또 비가 온다.
방수포 접기
밤새 비를 맞아 아련한 낙타의 눈빛...☆

 "잘 있어, 수반."
 "응, 너희도 조심히 가."
 "이건 얼마 안되지만 팁이야."
 나만 그의 직업정신에 감격한게 아닌지 모두가 너도 나도 팁을 주었다. 서로가 팁을 주려는 모습이 보기 좋다. 언젠가 자기 낙타를 사서 직접 투어를 운영하는게 꿈이라는데 이 팁이 작은 도움이나마 됐으면 좋겠다. 한 마리에 2만 루피(32만원), 한국의 물가에 비하면 소박한 그의 꿈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사막을 떠나는 길

 7.

 차를 타고 자이살메르로 돌아간다.
 황무지 곳곳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물웅덩이가 생겼다.
 사막에 폭풍우라니, 정말 별일이 다있네. 역시 인생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건가보다.

사막에 호수가 생겼다.

예고

 매거진 <그리다 세계여행>의 다음 글은 "세계최대의 슬럼가, 다라비를 바라보는 시선"이에요.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진짜 인도'라고 부르던 그곳에 직접 가봤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어떤 의미일까요? 11월 29일 금일 오전 7시 30분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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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출처 생략시 직접 촬영)

1. 썸네일 : By J.L. on Unsplash

2. 번개 : Elvis Bekman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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