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을 돌아 다시 글을 쓰기까지
지난 9월, 기간제로 중학교에서 한 달을 일할 때의 이야기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젓가락질’을 향한 서로 다른 관점의 글을 비교하는 단원이었다.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여러 가지 고민을 했다.
‘얘들아, 이 글 제목이 왜 이런 줄 알아? 너희 이 노래 알아?’
그리고 DJ DOC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3학년 귀염둥이들이 ‘이 노래가 뭐예요? 옛날 노래예요?’라는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본다. 제목이 그대로 나오는 노래 가사를 보며 가사가 특이하다고 웃기도 했다. 노래를 듣는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라는 노래 구절이 나온다. 추억에 젖은 내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지금 교복 반바지 입죠? 나 때는 그런 게 없었어, 얘들아.’
‘우와. 세대차이!’
나도 이제 어느덧 요즘 학생들에게 ‘라떼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대가 된 것이었다.
‘라떼는’ 중학생 때 인터넷소설이 유행이었다. 내 또래라면 귀여니의 소설을 읽고 한 번쯤 주인공 정태성과 권은형을 보며 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는 중딩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컴퓨터를 켜고 나만의 글을 썼다. 부끄럽지만 소규모의 팬카페도 있었다. 로맨스보다는 성장소설 같은 글을 많이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지할 곳 없이 다소 힘들었던 시기, 글 쓰는 것을 낙으로 삼아 무탈히 넘겼던 것 같다.
대학생 때까지도 꾸준히 글을 썼다. 여전히 인물의 성장기를 써 내려갔고,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시험기간에 밤을 새우는 와중에도 글을 업로드하며, 댓글 하나하나에 기뻐했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해하며 글 쓰는 재미를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글을 아예 쓰지 못하게 되었다. 방송작가가 되면서부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걸 업으로 삼을 수 있다니 이게 웬일이야,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연두야, 초등학생들이 봐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해. 네 원고를 읽고 애들이 이해할 수 있겠어?’
‘리포터가 읽는 원고니까 문어체보다는 구어체를 써야지. 말하듯이.’
‘쉽게 써야지.’
‘왜 이 부분에 이걸 썼어?’
한 마디로 멘붕이었다. 내가 원래 쓰던 글은 주로 문어체였다. 대학생활 내내 쉬운 단어보다는 어려운 단어를 골라 리포트를 작성했으니 방송국에서 쓰는 글과는 아예 맞지 않았던 것이다. 막내였기 때문에 방송 전 선배들의 컨펌을 받았었는데, 작가들도 개개인마다 글을 쓰고 구성하는 방식이 다 달라서 피드백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누구의 피드백을 따라갈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내 글을 잃어갔다. 언젠가부턴 구성 또한 자신이 없어졌다. 쓰기 자존감이 사라져 버렸고 그냥 내가 쓰면 다 안 될 것 같았다. 방송국에 있었던 2년 8개월 내내 원고를 컨펌받지 못하면 방송을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방송작가 경력 3년을 채워가는 시점, 나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그게 내가 방송작가를 그만둔 이유였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문제는 일을 그만두고도 더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노트북 전원을 켜는 것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글을 쓰려고 앉아도 A4 용지 한 장을 채우는 게 힘이 들었다. 나는 좋아하던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스스로를 다 잡지 못하는 나를 보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좋아했던 글을 다시 써보자는 것이었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지난 5년 간 나에게 있었던 일을 풀어내며 힘들었던 시간들을 조금씩 흘려보내자고.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건 친구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숨겨왔던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드라마로 써도 될 것 같다.’고 말했던 다사다난한 나의 성장 기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 글이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