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버스정류장에서 시작된 새로운 인생의 막

by 글이내벗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퇴근길이었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버스 도착 예정 시각부터 확인했다.

“이런, 방금 지나갔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10분.

3월 초, 아직 매서운 바람을 피하려 정류장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 정류장 벽면에 붙은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민 뮤지컬 시민배우 모집>

‘오~ 우리 동네에 이런 것도 있었어? 신선한데?’

그냥 홍보용 전단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가는 내내 머릿속에 그 모집공고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TV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의 연예인들을 보면서

나도 무대에 서서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 내성적이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나와 '상관없는 세상 이야기'로만 여겼다.

그렇게 40년을 살았는데, 오늘따라 그 시민배우 모집공고문이 자꾸 생각났다.

누군가 귓가에서 “지금이 그 기회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보통 무언가에 꽂혔더라도 하루만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식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 적어도 하루 이틀은 두고보는 편이다.

뮤지컬 참여에 대해서도 내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오히려 뮤지컬 배우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 있었다.

모집공고문을 사진 찍어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될 정도로 말이다.


내심 ‘이건 아무래도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날 퇴근길에 그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공고문은 그대로 붙어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검색창에 ‘○○시민 뮤지컬’을 입력했다.

작년 공연 관련 기사가 몇 개 떴다.

사진 속엔 5, 60대로 보이는 중년의 배우분들이 10명 남짓 있었고, 대부분 여성이었다.

‘내가 가면 거의 막내겠네. 청일점일 수도 있겠는데?’

기사를 보고 난 후 생각이 많아졌다.

‘배우분들 연령대가 꽤 있어 보이는데 내가 들어가도 괜찮을까?'

그러다 연장자가 되는 것보단 차라리 막내가 낫겠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하루만 더 생각해 보자.'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들었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회의 중에도, 머릿속에선 계속 무대 조명이 깜빡이고 있었다.

결국 결심했다.

“그래, 까짓것 한 번 해보자.”


하지만 이 결심을 무색하게 만들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내의 허락.

연습과 공연 준비에는 많은 시간이 들 텐데, 그동안 아이를 돌보는 건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 될 테니까.

이날 퇴근 후, 아내에게 슬쩍 말을 꺼냈다.


“여보, 나 도전해 보고 싶은 게 생겼어.”

“뭔데?”

“○○시민 뮤지컬에서 시민배우를 모집한다는데, 그거 한 번 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사실 속으로는 이미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놨다.

‘뭐라고? 그럼 아이는 나 혼자 봐야 하는 거야?’

‘엥? 여보가 뮤지컬 배우를 하겠다고? 그게 가능해?’

이런 반응일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오~ 좋은데? 여보 무대에 서보고 싶어 했잖아. 잘 됐네. 열심히 해봐. 우리는 걱정 말고.”

흔쾌히 승낙하는 아내의 말에 순간 울컥하여 고맙다는 말을 수십번도 더 한 것 같다.

나는 곧장 배달앱을 켜서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를 주문했다.

그 후 모집공고문에 적힌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뮤지컬에 참가를 희망합니다.

이름: 글이내벗(남자)

나이: 30대 후반

사는 곳: ○○동

공연 경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서보고 싶었고, 더 늦기 전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용기 있는 도전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약 2주 후 첫 모임이 있을 예정이며, 추후 다시 안내드리겠습니다.”


‘오예! 통과인가?’

나는 시험 합격 문자를 받은 것처럼 휴대폰을 들고 혼자 피식 웃었다.


그날 이후, 출퇴근길마다 상상했다.

'2주 뒤 첫 모임에는 어떤 사람들이 올까?'

'과연 나는 어떤 작품을 연기하게 될까?'

'7월 중순에 공연이라던데, 내가 정말 4개월 만에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마음은 편안했다.

‘정말로 내가 오래 간직해 온 꿈이 이뤄질 수도 있겠구나 .’

그렇게, 뮤지컬 공연을 한 번도 본 적 없던 내가,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무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주 후, 나는 생전 처음으로 ‘배우 OOO’라는 이름표를 달고 낯선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문 너머에 어떤 세상이 세상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문이 열리는 순간 내 인생의 새로운 막(幕)도 시작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