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오디션은 처음이지?

by 글이내벗


드디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첫 모임 날이 되었다.

퇴근길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들뜬 마음까지 더해져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문자로 받은 주소를 따라 찾아간 모임 장소는 놀랍게도 내가 자주 가던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병원과 학원으로 가득한 그곳에 문화공간이 있을 줄이야!


가벼운 발걸음 탓인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막상 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살짝 들여다보니 사람도 몇 없어서 더 주저하게 되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화장실에 들러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잠시 뒤 다시 돌아와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성함이?”

“아, 저... 글이내벗입니다.”

“반가워요, 글이내벗 쌤. 여기 이름 스티커 붙여주세요.”

나는 본능처럼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선배님들처럼 보이는 분들은 이미 화기애애했고,

새로 지원한 사람들은 어색함에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나 또한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라 그냥 조용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운영진이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OO시민 뮤지컬단은 기수 제로 운영되는데, 이번이 6기란다.

특히 이번 기수엔 젊은 분들, 그것도 남성 지원자가 유난히 많아서 놀랐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그랬다.

2, 30대로 보이는 분들이 많이 보였고, 남자도 절반쯤 되는 것 같았다.

‘오, 이거 제대로 된 공연이 되겠는데?’

기대감이 살짝 피어올랐다.


그렇게 첫 모임이 끝났다.

혹시나 뒤풀이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없었다.

‘나같이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은 뒤풀이 자리가 꼭 필요한데...’

아쉽지만 집에서 기다릴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며 서둘러 귀가했다.




일주일 후, 두 번째 모임.

보컬 선생님이 오셔서 발성 수업을 진행했다.

이 작은 지역 뮤지컬단에 연출, 보컬, 안무 선생님이 각각 있다는 것에 흠칫 놀랐다.


“아↗ 아↗ 아↗ 아↘ 아↘”

“이↗ 이↗ 이↗ 이↘ 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발성연습을 하는데 왠지 모르게 학창 시절 음악 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노래를 배우니 진짜 ‘뮤지컬단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실감이 났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갈 무렵, 조연출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폭탄 하나를 던지셨다.

“다음 주에는 배역 선정을 위한 오디션이 있습니다. 각자 노래 한 곡씩 준비해 오세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인생 첫 오디션이라니.

고등학교 시절, 친구 따라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려다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말에 지레 겁먹고 포기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물러섰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젠 나이도 먹었는데, 뭐가 무섭냐. 그냥 부딪혀 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마치 슈퍼스타K의 출연진이 된 듯 신중하게 오디션 곡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뮤지컬 <빨래>에 나오는 ‘참 예뻐요’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잔잔한 멜로디와 따뜻한 가사가 은은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며칠을 흥얼거린 끝에, 이 곡으로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했다.


출퇴근길엔 이어폰으로 반복 청취, 퇴근 후에는 코인노래방에서 연습, 심지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천 다리 밑에서 물소리를 반주 삼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이 들어 이런 열정을 다시 느낄 줄이야.'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리고 드디어 오디션 날이 밝았다.

조명이 비치는 작은 무대 위엔 피아노 한 대, 그 앞엔 조그마한 객석이 있었다.

‘혹시 앞에 앉으면 먼저 시킬까?’ 싶어 뒤쪽에 앉았고, 내 예상대로 오디션은 앞자리부터 시작됐다.

MR 반주로, 혹은 반주 없이 각자 준비해 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CCM을 부르시던 50대 여자분부터 과감하게 댄스곡을 준비해 와 관객들의 박수까지 유도하던 20대 남자분까지, 한 편의 ‘열린 음악회’를 보는 듯 했다.


충분히 즐겨도 되었을 만한 음악회였는데 나도 모르게 경쟁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이번에는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으로 변해 있었다.

속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분은 음색이 좋네.’

‘오, 저분은 완전히 프로인데?’

‘흠… 저 정도면 나도 할만한데?’


내 차례가 왔다.

무대 앞으로 나서자 작은 박수가 들렸다.

무대 위에 올라 관객을 바라보는데 조명이 눈부셔서 앞이 잘 안 보였다.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흘러나오는 <참 예뻐요>의 MR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참 예뻐요~오↗”


아뿔싸, 첫 소절부터 커다란 음 이탈을 내버렸다.

마치 첫 점프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피겨스케이트 선수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심장이 아니라 뇌가 떨리는 느낌이랄까.

앞에 앉아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보니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순간 나는 뒤로 돌아 벽을 향해 노래를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오디션장에서 벽을 보고 노래를 하다니!

당시의 엉뚱한 나의 행동에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렇게 1절을 겨우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세 시간짜리 콘서트를 마친 가수처럼 탈진해 있었다.

준비한 것의 절반만큼도 못 한 것 같은 아쉬움, 그래도 한편으로는 끝났다는 후련함, 음 이탈과 무대를 등져버린 기괴한 행동에서 비롯된 부끄러움까지,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하지만 오디션을 준비하고 끝마친 나 자신에게 뿌듯했다.

‘적어도 도망 치진 않았잖아.’




오디션이 끝나고 처음으로 뒤풀이가 열렸다.

호프집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무용담(?)을 풀었다.

나의 오디션을 본 누군가 말했다.

"처음에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길래 프로인 줄 알았어요!"

“뒤돌아서 벽 보고 노래하길래, 무슨 퍼포먼스를 준비했나 했죠!”

“우리 다 ‘짜잔!’하고 다시 뒤돌아볼 줄 알았는데 그대로 끝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의 오디션 해프닝에 다들 웃었고, 나도 웃었다.


며칠 뒤, 저녁 산책길에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연출 선생님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린 것이다.

순간, 직감했다.

'드디어 배역이 발표되는구나.'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단톡방에 올라온 파일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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