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by 글이내벗


대화방 속 파일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이럴 수가! 내 이름이 가장 위에 있었다.

그렇다. 주인공이었다.


“앗!”

나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주인공이 된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몇몇 분들이 자신의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만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실력도 없는 내가 어쩌다 주인공 역할을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하튼 이제 배역도 정해졌겠다, 본격적으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작품의 소재는 층간소음, 담배 냄새 등 아파트 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이웃들 간의 갈등이다.

나의 역할은 작가를 꿈꾸는 백수로서, 예민한 성격 탓에 윗집, 아랫집 이웃들과 자주 치고받는다.


대본 위에 형광펜으로 내 대사를 표시해 보니 양이 꽤 많았다.

‘이걸 언제 다 외우나?’하는 걱정을 하며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내가 듣기에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 뒤 연출 선생님께 준비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이렇게도 읽어보고 저렇게도 읽어봤다.

그리고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시간 날 때마다 뮤지컬 영상들을 찾아보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첫 대본 연습 날이 되었다.

연출 선생님이 가운데에 앉아 계시고, 배우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극은 천사와 악마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천사 역할을 맡은 분이 첫 대사를 읽었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내가 더 긴장되었다.


그녀의 첫 대사를 들은 연출 선생님의 반응은,

“다시요.”


짧고 강렬했다.

표정 없이 내뱉는 이 세 글자가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음을 좀 더 높여서 다시 읽어 보세요.”

“아니, 첫 음은 길게 끌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다시요.”


‘다시요’가 반복될수록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연습실 안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천사와 악마의 대화가 끝나면 바로 내가 맡은 역할인 백수의 독백이 이어진다.

내 대사 차례가 오기까지 혼자서 속으로 연습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최대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사를 읽었다.

그런데… 내 첫 대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요.”가 들려왔다.


그렇다. 나도 ‘다시요의 늪’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 나 지금 꽤 괜찮게 읽은 것 같은데, 뭐가 문제였지?’

어안이 벙벙하던 그때, 선생님께서 말했다.

“선생님 배역은 찌질하고 소심한 백수예요.

근데 지금 목소리는 너무 멋지고 당당해요. 그래서 연기가 오히려 어색해요.”


순간 멍해졌다.

‘대사를 틀리지 않고 잘 읽는 법’만 고민했지, 정작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찌질하고 소심한 백수라…’

찌질함을 표현하며 다시 읽어봤지만, 연습부족 탓인지 내가 들어도 어색했다.


한 열 번쯤 시도했을까?

결국 선생님이 한숨을 쉬면서 말씀하셨다.

“이 대사는 일단 삭제할게요.”


그렇게 내 첫 대사는 연습 첫날 날아갔다.

대사와 함께 내 자신감도 같이 날아갔다.




대사보다 더 큰 산이 있었으니 바로 노래였다.

주인공인 만큼 불러야 할 노래가 세 곡이나 되었다.

그중 두 곡은 솔로곡이었고, 나머지 한 곡은 듀엣곡이었다.


작곡자이자 반주를 맡은 선생님이 배우들을 한 명씩 불러 직접 만든 곡을 들려주셨다.

내가 불러야 할 노래의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이게 노래야?’라는 생각과 함께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와 리듬을 가진 노래였다.

랩도 아니고 발라도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쯤에 있을 만한 따라 부르기도 어려운 노래 같았다.

'내가 과연 이 노래들을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시 후 반주 선생님은 “백수의 노래라서 장기하 씨 노래 느낌으로 만들었어요.”라고 하셨다.

그제야 낯선 리듬의 정체가 이해됐다.

‘아… 이게 그 흔들흔들 건들건들 리듬이구나…’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노래에 대한 자신감은 사라져 갔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연습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곡이 너무 어려워 반주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려는 찰나, 선생님께서 먼저 내게 보충 수업을 제안하셨다.

그래서 주말 오후에도 연습실에 나와 반주 선생님과 두세 시간 정도 개인 연습을 했다.

반복 듣기를 통해 리듬에 익숙해지니 이번엔 불안한 음정이 문제였다.


"쌤! 할 수 있습니더! 자신감을 가즈이소!"

선생님의 응원을 듣고 나니 아이스크림을 먹은 듯 땀이 식었다.

그렇게 며칠을 흥얼거리며 출퇴근을 했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 보컬 레슨 날이 되었다.

이번엔 연출 선생님이 아니라 보컬 선생님 앞에서 연습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오디션은 끝났지만, 또 다른 오디션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나머지 공부까지 하면서 열심히 연습한 노래들을 불렀다.

선생님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노래 실력으로 어떻게 주인공이 된 거지?’라는 표정 같아 나는 더 위축됐다.


노래가 끝난 후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뮤지컬에선 노래도 대사의 일부예요. 그래서 캐릭터에 맞게 불러야 합니다.

선생님의 지금의 노래는 소심하고 찌질한 백수가 부르는 것치고 너무 정직하고 반듯해요.

그래서 선생님의 대사와 노래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에요.”


'소심하고 찌질한 백수... 넌 대체 어떤 놈인 게냐?'

내가 살아온 40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을 표현해 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부족한 점에 대한 피드백이 쌓여갈수록 '백수'라는 캐릭터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열정으로는 안 되는 거였나? 결국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건가?’

오디션을 준비할 때의 열정이 실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듯했다.


체념 섞인 한숨을 쉬고 있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시민 뮤지컬 단장님의 전화였다.

불길한 느낌에 전화를 받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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