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단장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내가 너무 못해서 배역을 바꾸시려는 건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좀 더 열심히 해볼걸' 하는 후회가 머리를 스쳤다.
잠시 뒤 휴대폰 너머 단장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글이내벗 쌤! 많이 힘드시죠?
쌤 지금 아주 잘하고 계세요. 그러니 주눅 들지 말고, 자신 있게 하세요!"
'휴... ' 다행히 배역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내가 너무 티 나게 주눅 들어 있었나?' 하는 생각에 민망하면서도, 단장님의 따뜻한 위로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날 이후, 나는 공연 연습에 더욱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하는 거,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 보자!'
출퇴근길에는 뮤지컬 공연 녹화본을 몇 번씩 돌려보았고 쉬는 날에는 직접 연극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극의 스토리에만 빠져 보았겠지만, 이제는 배우의 표정, 눈빛, 목소리, 몸짓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보았다.
또, 어떻게 하면 찌질한 역할을 잘 연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찌질한 캐릭터가 나오든 드라마도 찾아봤다.
지금 생각해도 참 열심이었다.
그렇게 뮤지컬에 푹 빠진 채로 두 달 정도를 보냈다.
사실 생전 무대에 서본 적 없는 내가 두 달 만에 연기와 노래가 수준급이 된다는 것은 기적에나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연습했다.
2~3주에 한 번씩 연출 선생님이 오실 때면 연습실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연출 선생님 앞에서 선보이는 연기에 따라 그 자리에서 대사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던 대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연출 선생님의 '다시요'의 공포가 잊혀 가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은 층간 소음과 담배 냄새에 시달리던 백수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라이터를 꺼내 이웃들을 위협하는 장면을 연습했는데, 하필 내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연출 선생님 앞에서 미친 척하며 화내는 연기를 보였다.
하지만 내 연기를 본 연출 선생님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선생님의 차가운 한숨에 나는 또 얼어붙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는 그게 아니죠, 글이내벗 쌔~앰!"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또다시 머릿속은 하얀 도화지가 되었다.
이내 연출 선생님의 시범 연기가 이어졌고, 나는 앞선 내 연기와 뭐가 다른지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일단 이해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대한 선생님을 따라 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선생님의 코웃음만 사버렸다.
"자~ 지금 백수는 그냥 폭발한 거예요. 앞뒤 안 가립니다. 다 같이 죽자 모드인 거예요. 아시겠죠?"
세 번째 시도가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평가가 간절했다.
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농담 반 진담 반의 한마디였다.
"휴.... 총으로 쏴버릴까?"
순간 연습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다들 웃는데, 나는 웃지 못했다.
귀가 빨개지고 눈물샘이 뜨거워졌다.
'내 연기가 그렇게 답답한가? 나도 답답해 죽겠다.'
'연출 선생님은 나를 주인공으로 발탁하신 걸 후회하실까?'
욱하는 마음에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하고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조용히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연습실 옆에 있는 작은 놀이터의 벤치에 앉았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서너 명이 미끄럼틀 위에서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영웅, 악당, 인질 등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의 역할에 푹 빠져 있었다.
배역에 몰입한 아이들의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저렇게 역할 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왜 나는 즐기기는커녕 스트레스에 둘러싸여 공연을 준비해야 하나? 그냥 즐겨보자. 내가 즐거우면 보는 사람도 재밌겠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연습실로 돌아갔다.
사실 그날 이후로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수십 번이었다.
'뮤지컬 배우가 나와 맞지도 않는 것 같은데, 굳이 왜 하겠다고 해서 마음고생을 사서 하나.'
하지만 이제 와서 하차하는 것이 동료들에게 더욱 민폐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내려놓지도 못했다.
이런 소심한 나를 무대 위에 올려준 것은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들이었다.
"글이내벗쌤, 어깨가 많이 무거우시죠? 그래도 쌤이 제일 잘하시니까 백수 역할을 맡은 거예요."
"그 많은 대사를 틀리지도 않으시네요? 대단하세요 진짜!"
함께 땀 흘리며 연습하고 난 후 동기들끼리 모여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서로를 보듬어 주던 그 시간.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리워질 만큼, 그 시간은 내게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동료애가 끈끈해진 만큼, 공연을 목전에 두고 연습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이던 연습이 두세 번으로 늘었고, 주말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합을 맞췄다.
연습 외에도 프로필 촬영, 포스터 제작, 소개 영상 및 홍보물 제작, 공연 홍보 등 공연을 올리는 데 필요한 작업들이 차근차근 이어졌다.
우리는 영세한 시민 뮤지컬단이다 보니 거의 모든 것을 '셀프'로 해결해야 했다.
운이 좋게도 동료 배우분 중 한 분이 사진이 취미라 프로필 촬영을 맡아주셨다.
웨딩 촬영 기사님도 어려워하던 나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단번에 잡아 이 분의 실력은 프로급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이 공연 포스터까지 만들었다는 데, 1인 제작사를 차려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린 조금씩, 공연이라는 꿈의 형태를 만들어 갔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공연자 안전교육도 수료하고 나니, 이제 정말 무대에 오르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나 잘 해낼 수 있을까?'
오지 않을 것 같던 공연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