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관심이 많던 아이 파이는 어느 날 교회로 들어가 신부를 마주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을 가리킨다.
“신이 왜 저랬어요? 왜 자기 아들을 보내서 평범한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받게 했어요?”
신부가 답한다.
“우릴 사랑해서지. 우리가 이해하게 만들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거야. 전능하신 신을 이해할 순 없어도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고통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긴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파이가 작가에게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어요. 인간의 죄를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다뇨. 무슨 사랑이 그래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中)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약성서 전체가 그분의 죽음을 다루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냈고
인간에게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하셨는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목사처럼 목사님들은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 역시 파이처럼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에게 아들을 죽음을 보여준 것이 사랑인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었으면 죄인이었지,
인간은 어째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는가.
그래서 어릴 때는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적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인과관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 피가 상징적으로 우리의 죄를 씻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상징으로 읽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 죄 사함, 구원은 인과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사님들조차 그 인과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했다.
“우릴 사랑해서지. 우리가 이해하게 만들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거야. 전능하신 신을 이해할 순 없어도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고통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이런 식의 설명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 죄 사함, 구원을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신약을 읽고 나서야 예수님의 죽음이 어째서 사랑이고 구원이고 죄 사함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악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줌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주신 데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
요점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동안
하나님은 인간을 쓸어버리시지 않으셨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누군가에게 맞고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면 길길이 날뛰며 그 아이를 찾고
그 아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학교를 찾아갔을 것이다.
자녀가 맞은 것만큼의 벌은 성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인간을 고문하지도,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시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으셨다.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어도
당신께서는 인간을 쓸어버리시지 않았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벌하지 않음으로써
당신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이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이며, 죄 사함이며, 구원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 말에는 이토록 큰 사랑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