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6. 02:05경 9년 전 사색
요즘 들어서 많이 느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갈등을 느끼면 먼저 상대방을 이상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임을 자처한다.
상식적이라는 말처럼 모순된 말도 없어 보인다.
누구에게나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타당한 상황
하지만 사람을 비상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대부분 그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상식이 될 수 없게 누군가에게는 찾아오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의 차이에서는 이미 상식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거지?
말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만을 이런 상황이라고 하나? 그래서 나는 그 상황의 차이를 많이 알고 싶어 했다.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
내가 알 수 없는 부분들을 보려고 했지만 사실 그 상황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공개하지 않으면 나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왜?
내 눈은 이미 상대방과 같은 곳을 보지 않고 있으며
내가 겪는 것들은 상대방과 매우 많은 방식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상황이라는 것은 극명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상황의 차이에서 생기는 감정은 결코 달갑지 않다.
그 감정은 이런 상황 차이에서 생기는 갈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가리고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임을 잘 아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참는 것 밖에 없었다.
상황이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내 상황만을 가지고 이야기해 봐야 전혀 나아질 게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그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나는 그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각기 다른 상황에서 원하는 것 또한 다르기 때문에 이 상황의 차이는 더 뭔가 막연해진다.
그래서 나는 갈등이 생기면 내 상황이 이렇다고 내 상황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이 상황이 전달되면 사람들은 공감을 해주고 상황을 공유하고 나와 상대방의 상식을 찾게 된다.
물론 이런 케이스는 아주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그 상대방의 상황을 전적으로 부정해서 상황을 공유하지 않고 던져버릴 때 나는 그걸 차별이라고 부르고 싶고 아마 일반적으로 그렇게 쓰일 것이다.
이 차별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면 안 되는 짓임을 알지만 누구나 쉽게 상황 해결 수단으로 사용을 한다.
차별을 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불쾌하다.
(여기서 한술 더 떠서 그런 차별을 하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운운할 때
그 이중성에서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는 나도 그 다른 사람의 상황을 알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때부터는 나도 차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그 차별은 강도가 심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쉽게 차별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런 다른 사람의 상황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정말 고맙다.
고맙고 따뜻하다.
상황을 전달하려는 사람은 정말 너무 고맙다. 차별은 함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대명사이고 상황의 차이를 인내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대명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차별이 싫다.
옳음 이란 게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지
다른 이에게 자기 자신만의 상식을 강요하는 게
얼마나 큰 폭력인지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