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끔하게 깎인 나무의 곁을 보이며
꽂혀있는 연필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는 연필을 꽤나 멋스럽게 잘 깎는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땐 미술시간이 무려 세 시간이었다.
스케치 작업에 꽤나 실력이 있었지만
색을 얹는 순간 A+에서 C가 되는 엄청난 용두사미의
학생이었던 나는 미술에 관심도 없었거니와
화장실 가기, 연필 깎기 외에는 자리 이동조차 못하게 하시는 엄격한 미술선생님의 통제 속에서의 세 시간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스케치가 아주 빨랐던 나는 연필을 자주 깎으러 가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연필 깎기를 어려워 손이 벌개진
친구들 연필을 한 명 한 명 다 깎아 주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반 친구들 연필을 다 깎아주니
나도 다른 친구들과 제시간에 맞춰 스케치를 끝낼 수 있었다.
그때 뭐랄까 나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이 잊히고
소복이 쌓이는 나뭇재와 흑심 그리고 나무향기
이곳에만 집중하는 순간이 너무나 편안했다.
그리고 미술 선생님께서도 쓰레기통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연필만 깎는 내게 딱히 지적하지 않으셨다.
모양도 향기도 다른 다양한 연필들
묵묵히 연필들을 깎아주고,
다음 미술 시간에도 늘 빨리 스케치를 마치고 연필을 깎아줬다. 뭉툭해지면 또 깎아줬다.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그때부턴 아주 유명한 연필깎이 선생님이 되어
“ 나 다음 시간 미술시간인데 연필 좀 깎아줘!”
하는 옆반 친구들 까지 생겼으며
때론 스트레스받을 땐 집에서 36색 색연필을 깎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연필은 샤프처럼 삐그덕 하는 신경 쓰이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딸깍 소리를 반복해서 내어 심을 빼서 써야 하지도 않다.(물론 편리함과 효율성은 인정한다)
연필을 돌려가서 쓰면 굵기도 달라진다.
하지만 부러지기라도 하면?
작은 심 하나는 내 가방 속을 뒹굴며 온 부분을 더럽힐 것이다.
그래서 연필을 쓰지 말아야 할까?
연필캡을 씌우면 된다.
안전장치는 찾으면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그날은 문득 나도 내 안에 힘이 부족하다 느끼면
작은 안전장치를 찾아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글씨가 다시 뭉개져온다.
돌리고 돌려도 뭉개져 오는 것을 보니
새롭게 깎아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