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오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한다.
굉장히 어렸을 때 한옥집에 살았던 탓인지 비 오는 날 마당을 보는 풍경은 어린 나이에도 제법 운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다락방에서 내려다보던 비 오는 마당은 참으로 그립다.
그래서 유독 비와 관련된 기억도 많은데 가장 기억 남는 몇 가지가 있다.
어느 해 여름, 통도사를 간 적이 있었다.
마침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장마철이었고 그런 까닭에 인적은 매우 드물었는데,
숲 속에 장대비가 내리는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소리와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그런 세상이 만들어진다.
굉장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고요함이 느껴지는 웅장함.
울창한 녹음 사이사이로 비가 세차게 쏟아지며 소리의 울림이 만드는 풍경은 살짝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쯤인지 자판기에서 밀크커피 한잔 뽑아 처마 밑에서 마시던 기억.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다.
그 경험 덕에 비 오는 날 고궁이나 공원 같은 곳에 가보는 것도 꽤 멋진 산책길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학교 때 살았던 집은 이층 창문에서 바깥이 굉장히 잘 보이는 집이었다.
그 창틀에 앉아 음악을 참 많이 들었었는데
어느 비 오던 날, 선배한테 선물 받은 테이프를 카세트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때 처음 흘러나온 곡이 'I like chopin'이라는 올드팝이었는데 마침 내리던 비와 어찌나 잘 맞던지 기분이 너무나 좋은 것이다. 한동안은 비 오는 날이면 꼭 찾아 듣고 했었다.
안 들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오랜만에 이 곡을 들어봐야겠다.
홍대입구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때 새벽에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는 데 역시 그날도 비가 쏟아졌다.
새벽이라 사람들도 없고 비는 미친 듯이 쏟아져 우산이 우산 역할을 못할 정도였기에
우리는 '될 대로 되라지' 텐션이 오를 데로 올라 신발도 벗고 빗물을 차며 놀았었다.
문 닫은 빈 가게 밑에서 음악 하던 친구는 노래를 부르고 그런 난리 난리 부르스의 밤.
비가 내리기 전에 나는 냄새.
아스팔트를 지치는 자동차 소리.
꽃가게, 과일가게들의 흔들리며 번지는 빛.
장대비가 쏟아지며 내리는 빗소리.
빗속을 걸어서 조금 축축해진 몸에 온기를 돌게 하는 따뜻한 차.
더 진하게 공기 속을 맴도는 커피 향.
이런 작은 풍경들이 나에게 비 오는 날의 서사를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