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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무 꽃차와 무화과

순례길 위의 사람들 1

by 그린망고

산이 좋네 숲이 좋네 떠들고 다니면서 정작 누가 나무 이름이라도 물을라 치면 꼼짝없이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된다. 꽃이든 열매든 뭐라도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찍어 맞춰 보겠다만.


'알 게 뭐람. 그냥 보면서 행복하면 됐지.' 하고 속으로 궁시렁대지만, 실은 나도 궁금하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가까이 자란, 지리산 인근에 사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산에 가면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애가 된다. "저건 무슨 나무야? 저거는? 그래서 저건?" 쉴 새 없이 캐묻는데도 성가신 기색 없이 대꾸해 준다. 잎사귀가 어떻고 수피(樹皮)는 어떻고 주절주절. 어차피 집에 돌아오면 다 잊어버릴 얘기들이지만, 들을 때만큼은 솔깃하다.






순례길 도상에는 다양한 수목이 있다. 그중 내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플라타너스나 포플러 정도다. 나는 플라타너스가 참 좋다. 널찍하고 풍성한 잎사귀로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펑퍼짐한 체형(수형이라고 해야 하나)도 어쩐지 정겹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감자칩을 먹던 순간이 떠올라 갑자기 행복해진다.


호리호리 비쭉 솟은 포플러 나무 사이를 지나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로 가는 길이었다. 긴 갈색 머리를 곱게 묶어 내린 청년이 나무에서 꽃을 따고 있었다. 이미 비닐봉지 안에 수북이 담겨 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차를 끓여 먹을 거란다. 자세히 보니 이파리도 들었다. 먹어보라며 꽃을 하나 건넨다. 여리여리한 꽃잎 몇 장에 팽이버섯 같은 수술이 여러 가닥 달린 옅은 노란색 꽃이었다.


순례길에서 아무 거나 주워 먹지 말란 얘길 들은 적이 있어 잠시 주저했으나, 궁금한 건 못 참는 성미라 냉큼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오! 달다.

무슨 꽃일까. 스마트 렌즈로 찾아보니 피나무꽃이라고 나온다. 한국에서 피나무를 본 적이 있는데 꽃은 다 떨어진 계절이었던 것 같다. 껍질은 약용으로 두루 쓰인다고 하니, 참으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독일에서 온 순례자인 이 청년은 이제 스물을 갓 지났을까, 아직 앳된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피나무꽃을 알고 차로 먹을 생각을 했을고. 봉지에 든 꽃을 보니 2주는 족히 먹겠다. 신통한지고.






유해진의 ‘스페인 하숙’을 촬영한 마을,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를 떠나던 날 아침이었다. 이번에는 단발머리 청년이 나뭇가지를 붙들고 벌그죽죽한 열매를 따고 있다. 그냥 지나가려다 결국 또 참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게 뭐야?”


“피게(Figue)."


프랑스 청년이로구나. 벌그죽죽한 열매는 무화과였다. 배낭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더니 과도를 꺼낸다. ‘어머, 과도를 가지고 다닌다고?’ 유럽 청년들은 참 재미나다. 갓 딴 무화과를 칼로 반 쪼개더니 먹어보란다. 나는 촌스럽게도 그때까지 생무화과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아, 어떤 맛일까. 말린 무화과처럼 달콤할까?’

냅다 한입 베어 문다.


오, 과육이 촉촉하고 부드럽다. 당도는 생각보단 덜하다. 난 구아바처럼 슴슴한 과일도 좋아하기 때문에 생무화과도 아주 맘에 들었다.


루이라는 이름의 이 프랑스 순례자와 잠시 함께 걸었다. 나보다 자그마한 체구의 루이는 제 몸보다 큰 야영 장비를 짊어진 채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 마당이나 공원 같은 곳에 텐트를 치고 매일 밤을 보내고 있단다. 배낭에 이것도 들고 저것도 들었다며 볼까지 발그레해져서는 신이 나 자랑을 한다. 네 배낭은 도라에몽의 주머니더냐. 대단하다. 10년만 젊었어도 나 역시 그런 여행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젊음이란 참 풋풋하고 싱그럽다.


유럽 친구들은 확실히 우리네보다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것 같다. 루이는 모르는 나무가 없었다. 구글 번역기까지 두드려 가며 열정적으로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귀여운 녀석.


순례길에서의 이런 경험들은 참 귀하다. 세상의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모양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과의 우연한 대화들.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순례길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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