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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더위 먹은 자들의 안식처

by 그린망고

순례길이라고 행복했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일은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다소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날은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로변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지나는 차도 거의 없는 2차선 도로지만, 그럼에도 아스팔트를 따라 걷는 건 왠지 황량하다.


사실 눈앞에서 찻길만 싸악 들어내면 풍경은 딱히 다를 것도 없다. 하늘은 여전히 커다랗고 청명하며, 노릇하게 익은 밀이삭은 지평선 너머까지 보드랍게 너울댄다. 잎사귀를 짙게 물들인 여름 나무는 쉬지 않고 산소를 뿜어낸다.


그럼에도 차도 옆을 걷는 건 싫다.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차가운 타르 곁에 자란 꽃들이 안쓰럽다. 어쩐지 파리해 보이는 것이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산에 들에 피는 꽃들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를 두메산골에 데려다 놓으면 오히려 더 파리해질 수도 있겠다. 나도 도시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으니, 저 말은 취소다.




그렇게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19km를 걷는 동안 강아지도 고양이도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역시 일진이 안 좋은 날이다.


공립 알베르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배낭으로 줄을 세워 두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노란 벽에 빨간 차양을 내린 귀여운 상점이 하나 보인다. 베이커리다. 한 입에 쏙 들어갈 크기의 크림 퍼프 두 개를 사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맛을 본다.

‘어머!’ 너무 맛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이 냉혹한 세상을 버틸 수 있는 건 행복의 역치가 낮아서인 것 같다. 다행이지 뭔가.


알베르게 체크인을 하고 여느 때와 같이 빨래를 한다. 오늘은 컨디션이 저조하니 코인 런드리를 이용한다. 빨래를 널어놓고 동네 구경을 나가려니 기운이 난다.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시청 건물을 보니 규모가 좀 있는 마을인 듯하다. 모던하면서도 고상한 정취를 풍기는 곳이다. 배가 출출해져 눈에 띄는 바르(Bar)에 들어갔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다 모여 있다. 맛집임에 틀림없다.


아쉽게도 이 시간대에는 타파스(Tapas)밖에 없단다. 주꾸미 튀김과 레몬맥주를 주문했다. 제목이 아무리 주꾸미 튀김이라지만 정말로 주꾸미만 수북하게 나온다. 튀김옷은 어디 가고 맨살이 다 드러나 있다. 시스루 스타일인가.


숙소에 돌아와 잠시 누웠다. 내 자리는 창가의 벙커 침대 아랫칸이었는데, 하필 창문의 블라인드가 고장 나 햇볕이 얼굴로 죄다 쏟아져 내린다. 선크림도 안 발랐구만. 기미가 더 진해지겠군. 혼자 중얼대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잤으려나. 눈을 뜨니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미친 듯이 뛰어댄다. 온몸이 뜨끈뜨끈하다. 더위를 된통 먹은 모양이다. 벽을 짚고 간신히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해 보지만 열기가 빠지지 않는다. 알베르게 어디에도 열을 식힐 만한 곳이 없다. 공황까지 오려고 한다.


아, 어디를 가야 볕에 녹아가는 이 몸뚱이를 소생시킬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그 흔한 에어컨 하나 있는 공간이 없단 말이냐.


머리를 쥐어짜 본다.


“앗!”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살갗에 느껴지던 그 한기.


성당이다.


그래, 성당으로 가자.

마침 알베르게 바로 옆에 성당이 하나 있었다.


성당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장소를 제대로 찾았다. 가만히 앉아 깊게 심호흡을 한다. 심장 박동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내 입에서 기도라는 것이 나오다니. 참 염치도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인기척이 느껴진다. 성당 안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사가 있나 보다. 얼떨결에 미사까지 보게 되었다.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께서 순례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기도를 해 주신다. 신부님의 손이 내 머리에 닿는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 꿈틀댄다. 행여 눈물이 나올까 부러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안수를 마친 뒤, 천사같이 말간 얼굴의 스페인 소녀가 곱게 색을 입힌 종이별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우리의 앞길을 밝혀 주고 지켜 줄 거라며.


이다지도 아름다운 마무리라니!


더위가 수그러들 때까지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람에 낭창낭창 일렁이는 포플러 나무를 바라보며 하루를 되돌아 보니, 오늘은 일진이 나쁜 날이 아니었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게 되는 순례길이다.


순례길 위의 더위 먹은 자들이여, 성당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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