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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27. 2023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강박적 유사능동성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나는 지금부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매우 주관적 관점에서 비판해 볼 작정이다. 이 사조들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사실이라는 족쇄는 우리의 자유와 꿈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이 어떤 형태로 인식되는지부터 살펴보자.


예를 들어 테러가 발생했을 경우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행위를 잔혹한 범죄로 인식한다. 특히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 되는 경우 이유보다는 그 상황과 사실 그리고 행동에 주목한다. 그러나 테러의 배후에 있는 집단에게 테러는 정의를 실현으로 보고 가해자를 영웅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같은 사건에 대한 사실의 해석이 그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를 변명할 여지없는 것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사실’은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사실’이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사실’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특히 국가의 탄생과 운영과정에서는 내적·외적으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집단들 간에 전쟁과 같은 폭력을 동반한 충돌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폭력적인 일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그것이 객관적 ‘사실’로 올바름의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있을까? 그러한 관점에서는 무엇이 '사실'인지에 대한 인식이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신념 체계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예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그 무엇보다 ‘사실’을 중시하는 과학의 발전에서 조차 쉽게 나타난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사실을 추구하지만 과학적 발견과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고 발전한다. 과거에 사실로 여겨졌던 것들이 새로운 증거와 이론에 의해 뒤집힐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의약품으로 개발된 헤로인의 경우, 당시의 의학적 지식으로 헤로인을 감기, 기침, 심지어 폐렴 치료에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결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헤로인의 중독성과 부작용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증거가 나타났다.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헤로인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불법화했다. 이는 과학적 '사실'도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완전한 객관성을 달성하는 것이 실제로는 어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고 명확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사실'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인식과 해석도 이에 따라 변형되고 재구성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주관적 경험들은 때때로 오류를 포함하거나 왜곡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단지 강렬한 확신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이 비교적 발전한 19세기부터 ‘사실’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인식을 강력하게 지배하며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배경이 되어왔다. 특히 이시기 등장한 리얼리즘이라는 사조는 현실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하려했다. 그 노력 덕분에 우리는 분명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물론 현실을 벗어난 추상적인 이상추구 보다야 훨씬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기에 사실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서 유효했다. 


그러한 이유로 이 후에 등장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현실의 사실적 재현과 함께 개인의 주관을 반영하면서 확장되고 변형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다만 모더니즘은 현실의 복잡성과 함께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 심리적 깊이를 중요하게 여겼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입장에 따른 상대주의적 관점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독창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 실은 리얼리즘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면으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의 잔재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사조들은 독특한 접근 방식과 철학을 개발했으며, 이는 단순히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구체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예술적, 문학적 흐름에 영양을 미친 이 독특한 특징과 혁신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그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소 극단적이고 도발적으로 보일지라도 모더니즘이 추구한 주관적 경험의 강조는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는 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한 상대주의적 관점 역시 현실의 입체성을 반영한 점에서는 사실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만을 보여주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은 사실에 기반한 개인적 진리추구라는 점에서 그 순수한 의도와는 다르게 역설적 상황들을 종종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등장한 모더니즘의 한 분파였던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는 전쟁을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미래주의를 창시한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1909년 발표한 ‘미래선언’에서 전쟁은 세계의 위대한 청소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낡은 가치와 관습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기에 사람들에게 강인함과 용기 희생정신을 키운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결국 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부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구성주와와 같은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촉구하고 혁명적 사상을 전파하는데 활용되었다. 때문에 내전과 전쟁을 정당화 하는데 활용되면서 결국 공산주의국가의 건설에 기여하게 되었다. 물론 공산주의가 옳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관점은 아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그리고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내용은 결코 인류에게 긍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도움을 받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결코 가볍거나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순진하고 순수한 생각이 만든 현상은 높은 수준의 참혹한 결과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모더니즘은 진리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중요한 수단이 분명하지만, 인간은 자주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단지 지식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결국 진리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특정 권력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이는 곧 억압의 재생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더니즘은 자주 사실을 담보로 만든 권력구조가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무기력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추구보다는 상호존중에 대한 이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 한계가 쉽게 노출되었다. 사실의 주관성과 상대성은 결국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음을 간과하게 한다. 예를 들어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했을 때,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현상은 참혹한 살육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 처한 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전쟁이 발생했다는 사실? 아니면 전쟁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에 참여한 주체의 상대적 입장과 관점? 정말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전쟁의 참화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일까? 


사실 이런 질문은 전쟁을 멈추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전쟁에는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서로 다른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는 순간 그 과정에서 사실에 기반을 둔 옳음을 찾아내기조차 쉽지 않다. 그것을 찾는 시간동안에도 전쟁은 이어질 것이 뻔하고 전쟁의 포화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평범한 개인들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일단 전쟁을 멈추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한번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현실에서는 명분과 피해의 회복이라는 복잡한 문제들이 섞인다. 때문에 응징과 보복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상은 단지 구현되기 어려운 상상일 뿐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이를 쉽게 멈출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을 추구하고 반드시 그것에 기반을 두어야만 실질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또한 자신의 믿음과 신념이 사실에 기반들 둔 확신인지조차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열정이 리얼리즘이 펼쳐놓은 ‘사실’의 그물에 잡힌 물고기와 같이 느껴진다. 어부에게는 유용하지만 물고기의 입장에서는 자체로 자유를 갖지 못하는 상태, 그렇기에 나에게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물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럽 연합(EU)의 결성은 현실적 사실이 제공하는 많은 문제들을 뛰어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U의 등장은 20세기 중반의 유럽이 직면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되었다. 당시 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극심한 파괴와 분열을 겪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불안정성과 경제적 침체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각국은 갈등과 분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협력과 통합의 모델을 제시하며, 평화와 번영을 이루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실행했다.


EU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재건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 이후, 유럽 국가들은 경제 회복을 위해 국가 간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석탄과 철강 같은 주요 산업 자원의 관리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이 초기 협력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협력은 점차 정치적 통합으로 발전하며, EU의 기본 틀을 형성하게 된다.


EU가 추구했던 주요 목적은 유럽 국가들 간의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통해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회원국 간의 국경을 넘는 경제적 협력을 촉진하고, 공동의 정책과 법률을 통해 유럽 내부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EU는 또한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국가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찾았다. 이는 국가 간의 상호 의존성을 강화하고, 공동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EU는 국가주의적 경향을 넘어서는 포괄적인 유럽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수천 년간 전쟁을 이어온 그리고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전쟁의 상흔을 남긴 이 지역에 높은 수준의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갈등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별 국가의 정체성을 무시하거나 훼손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이는 분명 언어, 문화, 인종이 갖는 특성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개별국가의 특성을 모두 존중하는 방향에서 얻은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유엔의 역할도 인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유엔의 상임이사국 운영에 관하여 자신의 도덕관 혹은 정치적 입장이 실행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실은 이 상임이사국제도가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다. 물론 적극적인 방법은 아닌 경우가 많을지라도 전쟁의 확산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아무것도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름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나는 주목한다.


물론 이해관계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종종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빠르게 움직이고,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문화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게으르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당장 지금이 아니라면 안 될 것만 같은 일들이 자신을 옥죄어오고 그로 인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게 도대체 얼마나 될까? 결국 우리는 그 무엇을 함으로써 변화 없는 상태와 갈등을 조장하는데 일조하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강박적 유사능동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욱 가벼워지고 더욱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제 아무리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해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숨을 수는 것조차 무엇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할 때, 실제로는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며,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행동을 서두르지 않고, 상황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를 정말로 억압하고 있는 실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을 반영한 급박한 현실은 결국 이러한 노력을 방해한다. 그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막연함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소한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면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정치적 폭력과 권력적 억압에서 더 창의적인 대안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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