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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Feb 27. 2024

손흥민에게 이강인이 대든 날 나는 카타르로 날아갔다

축구는 정말 인생과 닮아 있더라~  

카타르 도하는 행사를 참 많이 하더라


“이번엔 아시안컵 우승할거야.”

사람들은 이런 확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황희찬, 황인범, 조규성 등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축구의 황금세대가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었다. 우승에 대한 기대는 더이상 가능성이 아닌 당연한 확신이었다. 나는 도하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로 했다. 보통의 경우 조별리그전을 관람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었지만,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너먼트의 위험성을 쉽게 무시했다. 우승의 현장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은 그 것만으로도 설레였다. 아시안컵이 시작되고 불안한 첫 게임을 치루었지만 첫 게임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것은 항공권을 구매하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어떤 고려없이 부랴부랴 항공권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머리속은 온통 카타르 도하에서 국대유니폼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우승을 응원하는 모습으로 채워졌다. 평소보다 비싼 항공편 그리고 꽤다 하드한 숙박비용이 지불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우승 그 역사적 현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설날에 결승전이라니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비행편을 예약하는 날 그러니까 리그전 마지막 게임인 말레이시아와의 경기가 신통치 않았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우리 선수들의 몸놀림과는 사뭇 달랐다. 예약을 끝내고 나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16강 토너먼트 게임인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먹는 순간 불안은 후회로 변했다. 혹여 예약을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우리선수들은 이 게임에서 극적으로 승리했다. 8강전에는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호주와의 경기를 보게되었다.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4강이 치루어지는 전 날 새벽 0시였다. 호주에게 패배한다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4강부터 보기로 마음먹은 일은 헛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내 간절함이 있었지만 우리 대표팀은 사우디전 처럼 또 다시 선제골로 돌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조금씩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런 혼란한 마음이 나를 엄습할 무렵 손흥민이 패널티킥을 얻고 황희찬이 동점골을 만들었다. 아시안컵 대회에서 내가 느낀 가장 강력한 카타르시스였다. 후반이 끝날 무렵 황희찬이 얻은 프리킥을 손흥민이 골로 만들 때는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설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행복회로가 강하게 작동했다. 


이제 필요한 건 4강전 티켓이었다. 8강이 끝나자 마자 나는 공식 홈페이지를 검색하고 그 말도안되는 인간 이모티콘 걸음걸이를 지켜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다른방법도 동시에 찾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응원 까페가 검색되면서 카타르 한인회 단톡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기 관람을 원하는 한인들이 대거 단톡방으로 입장하기 시작했고, 한인회에서 1000장의 티켓을 준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출발도 못한 나에게 기회는 없었다. 오직 현장에서 거래가 가능한 사람들에게만 티켓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00장의 티켓 전부를 한인회 회장이 사비를 털어 구매한다고 했다. 무려 1억원어치라고 한다. 난 그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단톡방이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모든 티켓이 마감되었고 왜 한인회장은 사비를 털어 그런 선심을 베푸는지 이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나처럼 비행기를 타지 못한 사람들도 수두륵 했다. 현장에 있는 한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 경험한 나로선 전율이었다.


어쩌면 패배예감이었을 것이다


그런 우여곡절은 결국 슬픈 결말로 치달았다. 카타르에 도착하는 날 우리 대표팀은 4강에서 요르단에게 패배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어떻게 요르단 같은 약체에게 패할 수 있는지 분통을 터트리곤 했다. 나 역시 이 패배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축구를 보기위해 카타르까지 날아가지 않았는가? 그런 노력에 대한 결실을 얻지못한 내 심리는 심정적 복잡함을 넘어 깊은 우울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는 왜 무리하면서 까지 카타르 도하에 갔을까? 그야말로 인생의 허무를 만끽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런 논리로 무장하는 순간 우리는 절대로 우리보다 강한 팀을 이겨서도 이길 수도 없는 것이다. 축구공은 둥글고 강자였더라도 얼마든지 약자에게 패배할 수 있다. 그것이 스포츠가 제시하는 선물일수도 있을 것이다. 공허했지만 애써 나는 나를 위로해야만 했다. 어쨋든 모든 선택은 내 몫이고 그 책임도 당연히 내것이니까 말이다.


카타르 도하의 거리는 특히 전통시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요르단 사람들에게 어쩌면 오늘의 경기는 기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요르단 인파는 자국의 국기를 흔들며 광장과 골목을 휩쓸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그들이 충분히 흥분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청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발산했다. 그것은 꽤나 강렬했다. 우연찮게 그 현장에 나도 있었다. 흥에 겨워 주체를 못하는 무리 중 한 사람이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말하자마자 그는 통쾌하다는 듯 “한국은 패배했어. 요르단은 강해.”라고 외쳤다. 부글부글한 마음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소 짓는 것이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그런 너의 생각에 반대한다는 어떤 말도 생각도 무리였다. 연신 싱글 벙글거리는 그 녀석은 말을 섞어왔다. “난 한국을 정말 사랑해 브로. 아이유도 좋아해. 우리는 형제야 브로. 내말이 맞지? 그러니 결승전에서 요르단을 응원해줘.” 그 말을 듣는 순간 쪼잔한 나는 복수심이 발동했다. 받은만큼 돌려주어야 속이 편한 법이니까 말이다. 당시 아직 이란과 카타르의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카타르가 결승에 갈 거라고 말하고 카타르를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나의 발언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모습이 아님이 분명했다. 경쾌했던 그가 조금 침착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뭔가 한 대 맞고 두 대 때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와 헤어질 무렵 그에게 “요르단은 강해 브로. 진심으로 응원할게”라는 말을 남겼다.


막 인터뷰도 하고 그러든데 췟 핏 흥인 기분이었다.


4강이 확정된 날 거리는 뜨거웠다.


4강이 치러진 날 이후 아시안컵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쨌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11일 날까지는 카타르에 머물러야 하니까 말이다. 시간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단순한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어서 흥미롭지 않았다. 그래도 은둔형 외톨이가 될 수 없어서 밤에는 호텔근처 아일리쉬바에서 비싼 맥주를 마시거나 낮에는 유명 관광지를 방문하거나 당시 카타르에서 행해졌던 국제 아쿠아 대회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디 갔다. 그리고 그 무엇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축구는 분명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였다. 난 축알못이었고 축구를 그렇게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꽤나 강렬한 충격이어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예상대로 카타르는 결승에 진출했고 2년 연속 우승국이 되었다.


이탈리아를 응원하기도 했고 헝가리를 응원하기도 했다. 그렇다 난 수구를 보러 카타르에 간 것이다.


뭐 그렇게 나의 아시안컵 원정은 시시하게 끝이 났다. 그런데 귀국 후 언론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되었다. 국가대표팀의 갈등 이슈였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4강이 이루어지 전날 대표팀 선수들은 엉뚱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혈류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바람을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있었을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티켓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일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했던 나의 기대가 무시당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날카로운 칼날로 분노로 변했다. 문제의 주역이었던 선수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인식은 바뀌고 있었다. 어린나이에 일찍 성공하니 뵈는 게 없는 것이 아닌가? 뭐 그건 순전히 내세계의 일이었지만 기분이 그랬다. 마치 옆에 있으면 몸 시비라도 걸고 싶고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투자한 돈과 시간을 망친 원인이 분명했다.


시간지 흐른 지금 어린선수는 사과를 했고 주장은 기꺼이 그것을 수용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장은 어린선수에 대한 이해를 부탁하기 까지 했다. 그것이 어떤 의도와 설계에 의한 기획이었더라도 그것으로 나는 충분했다.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물론 애초에 매우 편파적으로 우리 대표팀 주장을 신뢰하고 좋아했던 탓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이상한 상황은 나를 점점 축구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포지션의 이해나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현대축구가 무엇인지 등 축구를 즐기기 위해 알아야 하는 많은 것들을 습관적으로 검색하고 섭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축구행정까지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축협과 감독의 역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축구팬들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몰랐던 사실을 배우기도 했다. 이 무렵 나는 박항서 감독이나 홍명보 감독 뿐 아니라 김기동 감독이나 이정효 감독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댓글로 그들의 존재를 접했는데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인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흥미롭게도 방구석에서 유튭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축구를 재미있게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스포츠의 본질적인 도전과 극복에 대한 진정성을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축구다


내가 축구관련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분명한 감정은 모든 스포츠는 도전과 극복 그리고 진정성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기반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에 많은 영감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극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전달하는 매체로서 스포츠는 매우 독창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강렬함에 이끌려 들어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문득 카타르에서 요르단사람들의 그 황홀해 하는 표정 그리고 기꺼이 나를 친구로 형제로 불렀던 그 요르단 사람이 생각났다. 기분 나쁜 기억이 만들어진 그 날 나는 그를 만났고 내가 얻게 된 패배감은 그에게 있어서는 행복감으로 등치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와 나는 웃으며 농담했고 그를 행복하게 했던 어쩌면 나의 패배를 같이 기뻐했다. 이것은 분명 양가적인 것이지만 분명한 부인할 수 없는 그 날 나의 감정이다. 그를 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요르단 선수들이 진정성있는 투지와 열정을 보여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떳떳하고 당당한 것이 분명하다. 그가 요르단의 승리를 자랑할 때 박수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과거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현재와 미래에서 그리고 축구장 위에서 그들이 최고 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투지와 열정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것은 반드시 진정성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 진정성있는 열정과 투지가 있어야 우리가 비로소 함께 즐거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한 감정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다면 패배가 무슨 상관일까? 질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승리하면 더욱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보여진다면 다시 나는 축구를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존중하는 선수들의 열정을 그 진정성있는 마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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