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Jul 09. 2018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멀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내 어린 시절의 맨 처음 몇 해, 아니 그보다 더 멀리 나의 조상들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자신들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이야기를 완전히 꿰뚫어보고 파악할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마치 신이 직접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드려주기라도 하는 듯 언제 어디나 가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묘사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들도 물론 그렇게는 못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공의 인간, 어떤 가능한 어떤 이상적인, 또는 어쨌든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존재하는, 단 한 번뿐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냐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은 예전보다 잘 모른다. 그 모두가 저마다 자연의 아주 소중한, 딱 한 번뿐인 시도인 인간들을 총으로 쏘아 대규모로 죽이는 판이니 말이다. 우리가 단 한 번 뿐인 인간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누구든 우리 각자를 정말 총알 하나로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상들이 교차하는 지점, 단 한 번 뿐이고 아주 특별한,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고 특이한 한 지점이다. 단 한 번만 그렇게 존재하는, 두 번 다시는 없는 지점이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소중하고 영원하고 거룩하며, 그래서 어쨌든 아직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충족시키는 인간은 누구라도 극히 주목할 만한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 모든 인간 각자에게서 정신이 형상이 되고, 각자에게서 피조물이 고통받고, 각자에게서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오늘날에는 인간이 대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인간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사람들은 죽을 때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는다.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것이다. 


나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냥 탐색하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는 별들과 책들에서 탐색하지 않고 그저 내 안에서 피가 속삭이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편안하지도, 달콤하거나 잘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내 이야기는 오히려 거짓말을 원치 않는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부조리와 혼란, 꿈과 광기의 맛이 난다.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의 시도이며 좁은 오솔길을 가리켜 보여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건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어떤 이는 둔하게, 어떤 이는 더 환하게, 누구나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구나 제 탄생의 찌꺼기를, 저 근원세계의 점액질과 알껍질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이나 개미로 남아 있다. 어떤 이들은 상체는 인간인데 하체는 물고기다. 하지만 누구나 인간이 되라고 던진 자연의 내던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기원, 그 어머니들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하지만 깊은 심연에서 밖으로 내던져진 하나의 시도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 헤세, <데미안>, 서문, 문예출판사



데미안을 다 읽고 나면 꼭 서문을 다시본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이르는 길을 생각해본다. 가끔은 나를 버릴 때, 내가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데미안은 하나의 딜레마다. 나를 찾으면서 동시에 나를 버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헤세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찾는 구도의 길을 보여주는 데, 데미안은 어린 시절의 구도의 모습,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청장년, 유리알 유희는 노년이 탐구해야할 구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책들은 선과 악의 세계, 이성과 감성의 세계, 순간과 영원의 세계를 다룬다. 이 세 책은 서로 같으면서 다른데, 그것은 헤세 자신이 매 순간 자신의 길을 강렬하게 탐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헤세를 읽는 건 단지 이 이유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엿보기 위해서. 







매거진의 이전글 집중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