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꾸지 않은 꿈, 에스페란자호 승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의 선원이 된 김연식 항해사. 김연식 항해사가 어떻게 에스페란자 호에 승선하게 되었는지, 첫 항해인 칠레 방문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 편에 걸쳐 소개드립니다. 서른셋 한국 청년이 어쩌다 국제환경단체의 배에 끌리게 되었는지 확인해보세요.
2015년 11월 1일. 그린피스 에스페란자(Esperanza)호는 콜롬비아를 지나 페루 연안을 따라 남쪽 칠레를 향해 항해한다. 이 일대는 혹등고래가 출몰하는 지역이라 속도를 높일 수 없다. 배는 천천히 적도를 향해 달린다.
대서양에서 파나마 운하를 건너 태평양으로 넘어온 지 이틀째. 주말이라 선상 바비큐 파티가 열린다. 주방장 다니엘(멕시코)이 선미 넓은 공간에 숯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는다. 선장 조엘(미국)과 기관장 벤트(독일)를 비롯해 이탈리아, 러시아, 호주, 스페인,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 15개국에서 온 선원이 그 주변을 둘러싼다. 각자의 악센트를 담은 영어로 배는 시끌벅적하다.
승선한지 사흘밖에 안 된 나는 아직 영어가 불편하다. 그 틈바구니에 벙어리 삼룡이가 되어서 주변을 둘러본다. 마냥 신기하다. 내가 어쩌다 피부색 다른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먹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바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상업 선박회사에서 항해사로 일하던 내가 말이다.
내가 그린피스의 선박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6개월쯤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부정기 벌크화물선에 승선하고 있었다. 길이가 200미터도 넘는 대형 상선을 타고 지난 5년간 전 세계 36개국에 기항했다. 큰 바다를 항해하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항구에 상륙했다. 그 이야기를 모아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예담, 2015)>라는 책을 탈고하고 난 후였다. 인생의 목표였던 책을 썼으니 이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그린피스가 번쩍 떠올랐다.
그 길로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그린피스의 활동을 둘러봤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빠져들더니 어느 순간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게 확 올라왔다. 이게 뭔가 싶었다. 한번 마음이 기울자 나는 밤이 깊도록 마우스를 놓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전부 찾아보고, 그린피스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샅샅이 구경했다. 그 날 그린피스에 환경감시선 세 척이 있는 걸 알게 되었고, 당연하게 지원서를 썼다. 에스페란자(‘희망’이라는 뜻)라는 배가 유난히 끌렸다. 이미 내 마음은 에스페란자에 있었다.
숙고에 숙고를 거쳐 자기소개서를 썼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끝에 연애편지를 보내는 심정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명문대에 가겠다 싶고, 이렇게 연애를 하면 김태희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다(물론 심정적으로만 말이다). 그렇게 간절한 기원을 담아 떨리는 마음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이메일을 보내고부터는 스토커로 변신했다. 제대로 보낸 건지 궁금한 마음에 매 시간마다 ‘수신 확인’을 눌렀다. 조바심이 났는지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식당에서, 영화관에서 수도 없이 ‘수신 확인’을 눌러댔다. 그러기를 며칠. 실망스럽지만 끝내 아무도 내 메일을 열지 않았다.
스토킹의 시작은 관심, 탐색, 접근, 접촉, 집착이 아니던가(미리 밝히지만 스토킹을 해본 적은 없다. 정말이다). 자연스레 집착이 생겼다. 그래. 이메일로 안 되면 전화다. 그린피스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우리보다 7시간이 느리다. 우리 오후 4시에 암스테르담은 오전 9시다(서머타임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대표번호로 전화했다. 교환원이 받았다.
- 해사부 직원들은 아직 출근 안 했습니다.
- 아, 네. 한 시간 후에 다시 전화할게요.
한 시간 뒤.
- 아까 전화했던... 해사부 찾던...
- 아, 네. 지금 회의 중입니다.
- 아, 네... 그러면 오후에 다시 연락할게요.
그리고 오후.
- 아까 그.. 해사부...
- 아, 전부 외근 중입니다.
- 네, 그러면 메모 좀 전해주세요. 저는 한국에 사는 김연식이라고 하는데, 선원 지원서를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달라고요.
- 네. 알겠습니다. 뚝!
이런 통화를 일주일 넘게 반복했다. 나중에는 말이 점점 짧아져서
- 여기 한국. 해사부 좀.
- 또 너니? 없어.
- 응. 메모 전해줘.
- 알겠어. 안녕.
이렇게 단어만 나열해도 대화가 되었다. 교환원 놈이 정말로 메모를 전해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보낸 이메일의 ‘읽지 않음’ 표시는 바뀌지 않았다.
*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글: 김연식 /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에스페란자 호 3등 항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