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우리의 주권으로!
3월 마지막 주, 자정이 지난 어스름 속 부산 거리에 하나둘 수상한(?)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형광 연두색 옷을 입고 있었다면 환경미화원이었겠지만, 이들이 입고 있던 옷은 빨간 옷. 바로 이들의 정체는 ‘환경감시원'인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었죠.
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환경미화원이 아님에도 이들은 자정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바닥을 청소했습니다. 과연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부산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캠페인이라도 시작한 것이었을까요? 활동가들의 수상한 행동은 단순 청소도, 부산 거리를 청소하는 캠페인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부산역, 벡스코, 해운대를 포함한 부산 시내 10여 곳에 ‘리버스 그라피티(Reverse Graffiti)’를 남겼던 것입니다.
리버스 그라피티란 ‘역방향 예술’, 말 그대로 이미 칠해진 것을 ‘지워서’ 그라피티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먼지와 오염 물질로 더러워진 바닥이나 벽면을 깨끗이 닦아내 반영구적인 특정한 문양이나 메시지를 남기는 행위이죠. 영국의 예술가 폴 커티스(Paul Curtis)가 처음 시도한 활동으로, 시민들이 그라피티를 불법적인 낙서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보고 이와 같은 색다른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렇다면 그린피스는 부산 시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요?
2013년 광안대교를 올랐던 이후 그린피스는 계속해서 부산 시민 여러분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왔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상하듯이, 이번 그라피티도 원전과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세계 최대 원전 단지 고리 원전의 위험성에 관한 메시지죠.
부산에는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는 5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원전 사고가 불러올 수 있는 재난이 얼마나 처참한지 다시 한 번 목격한 바 있습니다. 5년이 지나 우리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듯 그날의 사고도 수습되었으면 좋겠지만, 지금도 후쿠시마 사고는 수습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린피스의 최근 조사 결과,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760만 헥타르(부산시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후쿠시마 인근 산림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향후 300년간 지속적으로 인근 지역을 재오염시키는 거대한 방사능 덩어리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조사 결과는 지난 7일 부산을 방문한 레인보우 워리어호 선상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발표되었습니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사고,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사고,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를 경험한 세계 많은 국가는 원전과의 점진적 이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이미 25개의 원전으로 국토 면적 대비 가장 많은 원전이 밀집해 있지만, 여기에 더해 3개가 건설 중이고 11개가 더 지어질 계획입니다. 선진국 중에서 원전 규모를 확대해 나가는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할 정도로 그야말로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산과 울산에 걸쳐 위치한 고리 원전의 위험성은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고리 원전은 전 세계에 있는 188개의 원전 단지 중 가장 큰 단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7개의 원전이 위치해 있고, 올해 운영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신고리 4호기까지 포함하면 원전 개수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8개의 원전이 위치하게 됩니다. 총 설치용량 규모로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죠.
이 세계 최대 원전 단지에서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후쿠시마 사고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심각할 것입니다. 전 국토가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고리 원전 인근 30~50km 지역은 수십 년간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 지역에는 부산항, 해운대, 현대자동차 공장, 울산석유화학산업단지 등 경제적으로 중요한 핵심 시설들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후쿠시마 사고로 이미 133조 원의 피해 비용이 발생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고리 원전에서 사고가 날 경우 우리는 그 이상, 아니 그 이상의 이상을 대가로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을 건 위험한 도박이 진행 중인 고리 원전에 정부는 다시 또 2개의 원전(신고리 5,6호기)을 추가 건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원전 부지 한 곳에 10개의 원전이 밀집된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위험입니다.
부산 시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린피스가 한국갤럽을 통해 부산시 거주 19세 이상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지난 3월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4%가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부산 시민들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 정책이 이렇게 시민들이 모르는 채로 진행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한 시민들의 50.7%가 이미 세계 최대 규모에 또다시 2개의 원전을 추가 건설하는 정부 정책에 대해 반대(찬성 27.4%, 모름 21.9%)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린피스는 더 많은 부산 시민들에게 이 ‘용납할 수 없는 위험’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부산 시민들이 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 앞에, 일종의 사명감마저 듭니다. 이미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이득을 위해 안전을 희생시킨 결과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큰 아픔을 겪으며 몸으로 느꼈습니다. 소수의 이득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인 ‘안전한 삶’이 침해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암울한 현실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까요?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안전한 부산을 위해 일할 대표를 잘 뽑는 것, 뽑힌 대표가 우리를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것에.
사실 부산 시민들은 이미 이를 증명한 바 있습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원전인 고리 1호기의 수명을 다시 한 번 연장하는 문제가 쟁점이 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후보들이 안전한 부산을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시민들의 목소리로 부산의 정치인들이 압박을 받았고, 결국 정부를 압박하여 2017년 6월 고리 1호기 영구 폐쇄라는 변화를 만들어 낸 바가 있습니다.
부산의 안전을 위협하는 신규 원전 건설도 시민들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린피스는 작년 9월부터 신고리 5,6호기 추가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만8천 명이 넘는 시민 여러분들이 서명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린피스는 이번 부산시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을 대상으로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한 입장을 묻는 정책 질의를 진행해 그 결과를 언론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시민 여러분들께 서명을 받으며 약속드렸던 대로, 이번 총선 후보들에게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했습니다. 정책 질의를 하는 과정에서 후보별 선거 캠프 담당자에게 구두로 설명하고, 서면으로도 전달했지만, 특히, 고리 원전 인근에 위치한 지역구 후보들 중 정책질의에 응답하지 않았거나, 신규 원전 건설에 조건부 찬성을 표했던 후보 3명(기장군 새누리당 윤상직 후보, 해운대구을 새누리당 배덕광 후보, 금정구 새누리당 김세연 후보)의 사무소에는 직접 찾아가 시민들의 서명을 전달했습니다. 신규 원전 건설 없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서 국민들의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 담긴 보고서도, 이번 시민 여론조사 결과와 후보 정책질의 결과도 함께 말이죠.
분명, 이번 총선 결과로 부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모두 신규 원전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후보 정책 질의 결과에서 보듯 이미 모든 야당 후보뿐만 아니라 3명의 여당 후보들까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할 정도의 진일보가 보입니다. 부산의 18명의 국회의원, 더 나아가 우리나라 300명의 국회의원 후보의 과반수 이상을 단계적 탈핵 – 신규 원전 계획 취소, 수명 연장 금지, 점진적인 원전 축소 – 입장을 가지게 만들 때까지 주권자인 국민들의 목소리를 알려야 합니다.
그린피스의 이번 후쿠시마 인근 지역 탐사를 총괄했고, 부산을 방문해 그 결과를 공유해준 그린피스 독일사무소 원전 수석 전문가 숀 버니(Shaun Burnie)는 독일이 탈핵을 선언하게 된 결정적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독일이 2022년까지 탈핵을 선언하게 된 것은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오랜 기간에 걸친 독일 시민들의 탈핵 운동에 있습니다.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주권자인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탈핵이라는 메시지를 지난 20년간 다양한 선거를 통해 끊임없이 정치인들에게 던져온 것이지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치지 않고 꾸준히 요구해 온 결과 진보, 중도, 보수를 아우르는 독일 내 주요 정당과 정치인들이 탈핵 입장을 갖게 됐습니다. 이는 바로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누구보다 부산이 안전하기를 소망하는 저는 주권자인 부산 시민들의 목소리가 이번 선거에서도 분명히 반영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부산 유권자들의 선택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후보가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지 확인하고 현명하게 선택합시다.
대한민국은 원전 공화국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4월 13일 나와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해, 부산의 안전을 위해 우리의 주권을 행사합시다.
글: 장다울 /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기후에너지 선임 캠페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