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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Dec 14. 2023

‘당근’에서 건반 구입한 사연과 후기

10년이 갓 넘은 짧은 교직 인생이지만 한 번도 교실에 피아노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초임 때는 합창단 지도 특명을 받으며 5학년 교실로 업라이트 피아노가 들어왔다. 물론 노래를 직접 지도한 건 아니지만 2년 동안 합창단을 관리하고 교실을 연습 장소로 내어주니, 일은 힘들어도 피아노 치는 맛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합창단 일이 내 곁을 떠났을 때 2년을 품었던 피아노도 함께 보내야 했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 학교엔 의외로 쓰지 않는 디지털 건반이 제법 있다는 사실. 그렇게 첫 임지에 있는 4년 동안 음악 시간에 피아노로 반주를 하며 수업을 하는 선생님으로 제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은사님이 계시던 학교로 이동을 했는데 처음에 받은 교실이 방과후교실을 개조한 곳이어서 그 넓이가 다른 교실의 1.5배쯤 되었다. 아이들의 공부 공간과 노는 공간을 따로 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뒷게시판은 다른 교실의 두 배여서 힘들었다. 그나마 가장 좋았던 건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없으면 일부러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교실에 이미 주리를 튼 피아노가 있으니 이것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그 해 아이를 낳고 잠시 학교를 떠나 있다 3년 후에 다시 복직을 했을 때 그때도 나는 피아노부터 찾았다. 감사하게도 안 쓰는 디지털 피아노가 3대나 되었다. 그중 가장 깔끔해 보이는 피아노를 교실로 들여와 신나게 쳤다. 해마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이고 지고 끌고 다녔다.


다시 학교 이동을 했다. 지금의 학교는 오케스트라가 있어 악기 소리가 수시로 들려왔는데, 예상외로 건반을 쓰지 못하게 했다. 주인 없는 악기를 보관만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학교 방침이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1학년 교육과정에는 피아노 반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보다 국악 노래가 많아서 한 학기는 피아노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피아노가 없는 교실이 못내 아쉬웠다. 2학기가 시작되던 날, 당근 앱에 ‘88건반’을 키워드로 등록했고 피아노와 동일한 88건반을 가진 저렴한 건반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마지노선이 되는 금액을 정한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올라오는 건반을 보며 마음을 쟀다. 보통 30만 원 정도의 제품이 올라오곤 했는데,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현금 박치기로 선뜻 쓰기에는 큰 금액이라 쉽사리 사겠다는 채팅을 보낼 수가 없었다. 가끔 정말 저렴한 건반 알람이 떴는데 수업 중이라 놓친 적도 몇 번이 되었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고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지, 어차피 내가 사용할 건데 저렴한 새 제품을 알아볼 것인지 갈팡질팡 고민하던 어느 날 우렁찬 ‘당근’ 소리가 울렸다. 인터넷 레시피를 켜놓고 저녁밥을 짓던 중이었는데 알람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열었더니 믿을 수 없는 금액의 건반이 올라왔다. 무려 6만 원! 판매자가 올린 제품명을 살펴보고 얼른 브랜드 검색을 마친 다음 사야겠다 결심하고 다시 살펴보니 관심 2개와 채팅이 2개가 있었다. 1분도 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발 빠른 움직임들을 보니 나처럼 키워드를 넣어놓은 게 분명했다. 얼른 채팅을 보냈다. 마음이 급해서 인사를 놓칠 뻔했지만 정신 차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건반 구매할 수 있을까요?” 이미 채팅 두 건으로 거래가 끝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장 오늘 거래할 거냐는 물음에 저녁 식사 후 바로 갈 수 있다고 했더니 오케이 사인이 돌아왔다. 야호!


차로 25분이 걸리는 곳까지 가서 드디어 저렴한 88건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거듭 감사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빨리 출근이 하고 싶어 기다려지긴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 교실에 건반을 들일 수 있었으니, 무려 11월 17일이었다. 남은 2학기 50일 남짓을 이 건반과 잘 보내야지 결심했다. 겨울 교과서에 있는 ‘아름다운 나라’를 배우고 ‘다섯 글자 예쁜 말’이라는 노래 악보를 나눠주고 또 함께 불러보았다. 종이 쳤고 수업은 끝났는데 나의 연주는 그칠 수 없었다. 백이면 백 역시나 아이들은 건반을 치는 담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모든 게 신기한 1학년 아닌가. 내가 치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 우와 하며 자주 감탄하는 아이, 장난으로 건반을 건드리며 방해하는 아이, 그런 아이를 향해 “야! 하지 마!”하고 말리는 아이까지.. 그 풍경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실력이 엄청난 것도 아닌데 늘 감탄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 늘 피아노로 잘난 척할 수 있었던 담임이다.


그제는 통합 겨울 수업 만들기 시간에 ‘멋진 눈사람’ 노래를 부르고 율동도 해보았다. 조금 아쉬운 건 연주를 하면서 가끔 건반을 봐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얼굴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력이 더 좋아져서 노래 부르는 아이들의 얼굴을 더 많이 바라보고 싶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래 부르기를 싫어해 입을 꾹 닫고 있는 아이를 보면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신나는 걸 왜 즐기지를 못하니? 다음으로는 크리스마스 노래 영상 촬영을 할까 하여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이라는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런데 G코드의 악보를 뽑고 보니 음이 많이 높았다. 선창을 하기가 벅차 즉석에서 F로 키를 낮춰 연주하느라 조금 버벅거리며 연주를 했다.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을 했지만 잘 치지는 못했기에 찝찝함이 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 피아노와 함께 했던 교직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칭찬을 들었다. 방과후 수업을 마친 혜진이가 교실 앞문을 살짝 열더니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하며 인사를 했다.  잘 가라고 양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더니 혜진이가 갑자기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 피아노 최고였어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칭찬에 정신이 아찔. 흔들던 양손을 더 신나게 흔들며 고맙다는 미소를 날렸다. 눈에 고인 눈물은 못 봤겠지? 족보 없는 코드 반주를 마음대로 신나게 휘갈기는 걸로 ‘피아노 엄청 잘 치는 우리 선생님’이라는 칭찬을 매해 듣는다. 이러니 내가 피아노를 포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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