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조급증
1. 엄마가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엄마가 되고 싶어.
“왜 네가 조급증을 내! 조급증을 내려면 40살 넘은 네 남자친구가 내야지! 우리 딸은 결혼이 왜 이렇게 하고 싶어?”
“풋, 엄마, 나 서른두 살이야. 서른두 살에게 왜 결혼하고 싶어 하냐고? 원래 그때쯤엔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웃어넘겼지만 엄마의 질문은 내 정곡을 찔렀다. 난 조급했다. 내 가족이 사라지기 전 새로운 내 가족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내 생에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이다. 그중에서도 엄마는 메가 로또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매일 밤 엄마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잠들었다. 부모님이 주말부부였던 탓에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오는 비가 반가웠다. 비가 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데리러 오는 엄마 덕분이었다. 수학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늦은 퇴근 후에도 철없는 딸의 부탁에 꾸벅꾸벅 졸면서도 공부하는 내 옆을 지켜주었다. 엄마는 나의 선생님이자, 친구, 언니 그 모든 것이었다.
그런 엄마가 몇 년 전 건강검진으로 알게 된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 몸은 잘 회복되었지만 건강염려증이 시작되었다. 조금만 어딘가가 쿡쿡 쑤시면 큰 병이 아닌가 하며 걱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죽음을 책으로 배운 딸은 엄마에게 ‘죽음이 무서워서 아픈 게 너무 걱정되는 거지? 다들 아픈 거야 왜 이렇게 걱정해.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워? 나랑 죽음을 똑바로 직면하자. 막연히 무서워하지 말고, 자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괜찮을 거야.’ 하며 전혀 위로되지 않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리곤 언제, 누가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 건강할 때 어떤 장례 절차를 밟고 싶은지, 혹여 식물인간이 되면 연명치료를 이어갈 건지 매년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며 한술 더 떴다. 나름 엄마를 위한 시간이었지만, 되돌아보면 내 머릿속에 엄마가 사라질 것을 똑똑히 새긴 시간이었다. 엄마 몰래 나는 두려워졌다. 진짜 엄마가 없어지면…. 어쩌지?
엄마가 종종 하던 ‘이해되지 않는 말’에서 해결 방법을 찾았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키우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경상도에 와본 적 없는 전라도 여자가 대구로 시집을 왔다. 박사과정 중이던 아빠와 결혼하자마자 아기가 생겼다. 아빠 학비를 벌기 위해 홀로 일하면서 아기를 키웠고, 교수 임용 후에는 20년 간 주말 부부 생활을 했다. 워킹맘이 홀로 애 둘을 다 키웠다는 이야기다. 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이해되지 않는 말이 내 희망이 되었다. ‘자녀를 통해 내 상상을 뛰어넘는 경이로운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희망만이 엄마를 떠나보내고 무너질 나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엄마가 되고 싶어졌다.
2. 건강한 아기 낳아야 하는데 자꾸 아프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우선 건강한 모체를 잘 가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환경호르몬을 조심했고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되도록 하지 않았다. 튀긴 음식, 인스턴트 음식, 불량식품들에는 손도 대지 않고, 담배는 평생 생각도 해본 적도 없다. 술 역시 일 년에 한두 번 홀짝거리는 것이 다였다. 일주일에 3번 이상 운동하면서 체력도 기르고 스트레스도 해소했다. 열심히 관리했다고 자부했지만, 이번 봄부터 내 몸은 아프다고, 힘들다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파릇파릇한 생명이 움트던 4월, 나는 스트레스성 무월경으로 호르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6월엔 허리 디스크가 터져서 고생했고 7월부터는 목과 어깨 통증이 심해져 등 전체가 아프기 시작했다. 회복되지 않던 통증에 정신을 못 차리던 8월 어느 날 이관개방증이라는 낯선 병까지 찾아왔다. 하루 종일 수영장 물속에 귀가 잠긴 듯 먹먹했다. 말할 땐 내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말을 하지 않을 땐 내 호흡소리가 내 두개골을 가득 채워 대화가 불가능 했다. 다행히 일도 좀 쉬고, 한의원도 열심히 다니면서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사이 훨씬 조급해졌다. 내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지? 이대로라면 난 결혼, 출산은 고사하고 일도 못할 것 같은데…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출산해야만 할 것 같았다.
3. 좀처럼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 되지를 않아!
내 삶의 중심에는 가정을 만드는 것, 즉 결혼하고 아기를 낳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커리어 적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가정 없이는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도, 내가 무너졌을 때 나를 일으킨 것은 나의 커리어가 아닌 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커리어를 쌓을 때도 결혼과 출산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배우자와 어느 곳에 정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 홀로 베이스캠프를 정하는 ‘동물병원 개원’은 내 선택지에 없었다. 미국에서 수년을 지내야 하는 전문의 과정 역시 미래의 배우자가 원치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다.
지금 내 커리어가 결혼하기 전까지 쌓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수의사가 된 이후 쉬는 날에도 항상 병원에서 공부하고, 논문을 썼다. 덕분에 진료 수의사로 일을 하면서 SCI급 논문만 5편 이상 발표했다. 내년엔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학원도 진학한다. 홀로 낼 힘은 다 쓴 것만 같다. 이제는 결혼하고 배우자와 함께 미뤄두었던 중요한 결정들을 하나씩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지지부진하게 미뤄지고 버틸 힘은 점점 빠진다. 결혼하면 새로운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남자친구는 결혼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최고조에 달했던 나의 조급함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면서였다. 함께 결혼할 사람도 없으니 나 혼자 조급해한다고 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남자 친구가 있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 노력으로 다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결혼, 임신, 출산은 기적이다. 앞으로 수십 년간 함께 살아갈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 노력만으로 될 리가.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임신과 출산이 내 맘대로 될 리가. 여태까지 나는 이 모든 기적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조급증을 내고 있었다. 로또 당첨돼야 하는데 도대체 왜 당첨이 안 되냐고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었다.
내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건강했다. 공부만 조금 잘하면 꽤 괜찮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내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났다. 내 인생에서 중요했던 요소들은 대부분 내 의지와 관련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삶에 기적이 찾아왔을 때 그 기적을 충분히 누리고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내 커리어를 결혼에 가두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는 것. 그리고 배우자를 찾기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런 것들.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세운 계획을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배우자를 선택했다면, 더 힘든 시간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내 목표를 위해 견디지 도 못할 상대의 모습들을 외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급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서 기대감이 움트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의 내 삶은 항상 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 생각지도 못했던 훨씬 좋은 일들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의류학과에 가고 싶던 나는 수의학과로 진학하게 되면서 적성을 찾았다. 내가 가고 싶던 대학원을 진학하지 못하면서 미투운동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동물병원에 취직하게 되면서 내 삶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던 남자친구와의 해피엔딩이 이별로 끝났지만 내게 정말 딱 맞는 배우자를 만나게 하기 위한 시간이라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랬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집중하며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