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에 발간된 『청록집』의 제명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시집으로 세 시인은 자연주의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 이후 시세계에서 각자의 길을 간다.
그 후 '청록집'이라는 같은 제명을 달고 나온 시집, 『靑鹿集 以後』는 1968년 11월 25일 초판본으로 <현암사>에서 발간했다. 총 375페이지로 시집으로는 매우 두껍다. 박목월의 시 34편, 조지훈의 시 29편, 박두진의 시 32편으로 총 95편이 실려 있다.
이 해는 박목월이 시인협회 회장에 선임되었고, 조지훈이 작고한다. 시집의 서문은 1968년 10월에 박두진이 쓰며, '청록파'로 출발했던 세 시인의 시적 경향이 이 시집에서 달라진다고 말한다.
시집에 포함된 시들은 박목월과 박두진은 스스로 선별했고, 조지훈은 이미 사망해서 두 사람이 기발표 작품들 중에서 선별해서 넣었다. 이 시집은 시인들이 직접 선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막한 삶에서 - 박목월
시인이 두 번째 선별한 시는 <당인리 근처> 다. 첫 번째 시 <하관>에서는 아우인 혈육의 죽음을 겪은 시인의 아픔을 볼 수 있다. 이제 현실 속에서 뿌리내리고 이겨내야 할 일이 남았다. 바로 '열매가 떨어지면 /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하관')을 그린 시인이 그 다음 선별한 시적 공간은 당인리였다.
당시 박목월은 홍익대학교에 출강을 하면서 한강이 가까운 당인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 그곳에 터를 마련해서 '보리, 수수, 감자'를 심고 싶다고 한다. '한 사. 오백 평 (돈이 얼만데)'하고 자조하면서 '아쉬운 것은 자연'이라고 한다. 당시에도 한강 부근의 땅은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 오백 평 / 땅을 가지고(돈이 얼만데) / 수수. 보리. 푸성귀 / (어림없는 꿈을) / 지친 삶 , 피로한 인생 '을 자연 가까운 땅을 마련해서 내려놓고 싶다고 미련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나는 한강 가까운 당인리에 집을 짓고 이사 오면서 목월의 이 시를 늘 마음에 넣고 지낸다. 목월은 살지 못하고 꿈만 꾸었던 그 땅에 이제 내가 산다. 물론 목월이 꿈꾸던 땅의 평수에는 어림도 없다. 부동산 공화국에서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마련한 게 어디냐고 생각하며 아주 작은 평수를 마련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리, 수수, 조를 키울 땅은 없다. 푸성귀조차 키울 여유도 없는 도시의 한가운데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목월이 바라보던 당인리는 그때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밭들이 있었을 그런 당인리를 목월이 지금 있어서 바라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자연이란 흘러가는 한강으로나 겨우 남은 당인리.
목월이 당인리 땅에 심고 싶어 한 것들은 소박한 음식을 만드는 곡물들이다.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보리, 조, 수수 등을 경작한 고고학 증거는 청동기시대의 여주 흔암리 유적과 부여 송국리 유적, 전남 남강 일대, 경주 등에서 발견된다. 이런 작물들은 애써 키우지 않아도 쉽게 자라는 것들이다. 그만큼 시인은 땅에 뿌리내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지금은 보기 쉽지 않지만 어릴 때 논밭에서는 쉽게 수수나 조를 볼 수 있었다. 수수밭에 들어가면 앞이 보이지가 않아서 껌껌하니 무서웠다. 게다가 바람이라도 불면 수수가 큰 대강이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가 더 무서웠다. 길을 잃을 것만 같아서 깊이 들어가지도 않고 바로 돌아서 나왔다.
수숫대를 털고 나면 수수빗자루를 만들었다. 동네서는 수숫대가 남아 돌아서 공터에 쌓아놓으면 아무나 가져가서 수수빗자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마당비를 따로 사지 않았다. 솜씨 좋은 외할아버지는 수숫대를 가지런히 해서 사이사이 묶으면서 수수빗자루를 만들었다. 부드럽고 빗자루 술이 가득하니 방그레 해서 마당이 싹싹 잘 쓸렸고, 수수깡도 깎아서 아무거나 만들면서 놀았다.
수수는 색이 붉어서 생일이나 돌에는 귀신의 접근을 막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기원의 의미로 수수떡을 만들어 돌렸다. 밥에는 아주 드문드문 넣어서 먹었던 기억밖에 없으니 그 많은 수수를 어디에 썼는지는 모른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마음먹고 해야 하는 것들을 그때는 가을걷이에서 남아서 했고, 동네 집집마다 수수빗자루는 대문간에 세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수수빗자루가 도깨비를 부른다고 생각해서 무서워했다.
그렇게 쉽게 잘 자라는 곡식들을 심고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희망을 걸고 싶은 곳이 목월에게는 당인리였다.
시 <적막한 식욕>에서 화자는 '모밀 묵이 먹고 싶다' 고 한다. 메밀묵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오르고, '산나물을 / 곁들여 놓고' 먹는 음식이며,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이다. 저승을 갈 때 '마지막 주막에서 /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젓가락이 가는 음식'이라는 구절처럼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다.
'메밀묵 사려어'라고 콘 목소리로 외치면서 추운 겨울밤이면 찹쌀떡과 함께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누군가 팔던 쓸쓸한 음식이다. 메밀은 가뭄이나 추위에 잘 견디고, 재배 기간도 짧고, 영양가와 저장성이 높아서 구황 작물로 이용하며, 막국수· 냉면· 부침·묵·차 등 다양하게 활용했다.
강원도 인제를 지나던 길에 허름한 집에서 막 뽑은 메밀 막국수를 찬 육수에 말아먹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험하고 깊은 골짜기에서도 먹을 수 있던 메밀. 이효석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소금이 흩뿌려진 것 같은 달밤의 흰 메밀꽃밭을 지나며 아들 동이를 만나던 그 흐뭇한 메밀. 그렇게 메밀묵은 우리의 정서가 응결된 음식이었다.
시 <산, 소묘 4>에서 '두릅, 휘휘초, 취. 범벅궁이. 달래. 돌미나리, 산나물을 광주리마다 채운다' 고 한다. 이 봄나물들은 새봄의 기운을 받아서 나는 것들로, 서민들은 보릿고개가 오는 때 산과 들에 지천인 나물들을 뜯어 춘궁기를 넘겼다. '휘휘초'나 '범벅궁이'가 어떤 식물인지는 모르지만 이름도 토속적인 봄나물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목월의 시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소박하고 현실적인 것들이다. 서민들이면 쉽게 구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꿈꾸면서 시 <경사>에서 '유자나무에 유자가 열리고, 귤나무에는 귤이 열리는 이 지순한 길'을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새벽 세 시'에 글을 쓰며 '설탕'을 녹인 '심야의 커피'를 혼자 마신다.('심야의 커피') 마음속에서 적막하고 쓸쓸하게 먹는 음식들은 그 시간 속에서 시에 들어간다.
슬프고 담담한 - 조지훈
조지훈의 시들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미 작고해서 박목월과 박두진이 선별한 시다. 시의 역사를 함께 했던 시인들이 고른 시로 보면 어쩌면 본인보다 시인을 더 잘 알 수도 있다.
시 <소리>에서 '냉이 싹, 보리싹 오만 푸나무 잎새들이 / 재잘거리는 소리다'라고 하며 봄이 오는 빛을 '노랑빛'으로 묘사한다. 삶은 순하고 부드럽고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봄의 노란빛은 산야에 먼저 피는 꽃인 민들레, 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 등으로 보면 생명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또한 노란색은 심리적으로 자신감과 낙천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지적인 분위기를 던진다.
이런 여유는 시 <산중문답>에서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 막걸리 한 잔을 따러 주신다',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이라는 구절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러나 시 <이기고 돌아오라-일선 병사들에게>에 가면 '반찬이라곤 손구락만 한 짠 무 쪽이 두 개 / 아니면 숟가락 총으로 두세 번 찍어 바른 고추장만으로 / 늬들은 그 험한 주먹밥을 단 꿀같이 먹더구나 / 사랑하는 아우들아 그것이 대체 몇 끼니 만에 먹는 밥이더란 말이냐'라고 하면서 굶으면서 전쟁을 치러야 했던 밥에 대한 탄식이 나온다. 전쟁의 도시락은 주먹밥이었지만 그마저도 총칼을 들고 싸우는 현장에서 없어서 먹지 못한 세월이었음을 쓴다.
농경사회를 영위하던 우리는 주먹밥이나 도시락의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다. 새참으로 먹는 음식도 푸짐하고 넉넉했다. 혼자 먹는 밥이 아니라 다 함께 둘러앉아 먹는 밥이었기 때문이다. 함지박에 든 새참을 가지고 논길을 걸어 가던 어른들을 따라서 막걸리 주전자까지 들고가던 길은 흥겨웠다. 그런데 전쟁으로 주먹밥을 먹지만 그마저도 먹기 힘든 밥으로 변한다.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는 남은 사람들도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는지도 쓴다.
시 <서울에 돌아와서> 에는 '버리고 돌아갔던 성북동 옛집에 / 피란 갔던 가족이 돌아와' 피란 중에 먹은 음식에 대해 들으며, '도토리 따먹느라 옻이 올라 진물이 나는 / 세 살 백이 어린것을 안고 빰을 부빈다'' 그리고 '<가재 잡아 구워 먹는 맛이 참 좋더라>는 말'을 하면서 들어온 '여섯 살짜리 큰 놈'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아이들을 두고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아내를 만나지 않고 집을 나서고, 어머니는 아직 고향에서 소식이 없고, 서울신문사 편집실에서 김영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의 생사를 아직 모르는 목월을 만난다. 그날(1950, 10,3)에 쓴 시다.
산에서 그저 주울 수 있는 도토리와 물가에서 그저 잡을 수 있던 가재등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던 전란의 음식들은 그 어떤 궁핍보다도 처연하다.
서울 수복 후에 이북에 갔을 때는 시 <패강무정浿江無情> 에서 '십 년 전 옛날 평원선 철로 닦을 무렵 내 원산에서 길 떠나 양덕 순천을 거쳐 걸어서 평양에 왔더니라.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단돈 12전, 냉면 쟁반 한 그릇 못 먹고 쓸쓸히 웃으며 떠났더니라 (1950, 10월)'라며 회상한다.
역사의 순간들만을 관통해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음식이 관련되면 더욱더 처절하고 비애롭다. 먹는다는 일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조지훈의 선별된 시에는 이렇게 상반적인 정서가 들어있는 음식 이미지들이 나온다.조지훈의 시라면 그동안 흔히 '생활이 없는 시'라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글에서 '생활이 없는 시가 어디 있느냐'는 시인의 말을 읽으면, 이 시집에 실린 시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시대가 안온한 상황일 때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나물들과 막걸리 잔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시대 상황이 불안한 순간에는 전쟁터든 후방이든 모두가 먹지도 못한다.
마침내 시인은 시 <병에게>에서 '잘 가게 이 친구 /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보세 그려(1968)'라고 하면서 그해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절명시를 쓰고 사망한다. 시인은 따스한 '차'를 나누어 마시는 친구처럼 병을 맞이한다.
청록파 3인이 찍은 사진 아래에는 조지훈의 병문안을 자주 다녔다고 쓰여 있다.
성북동에서 반생을 살다 간 조지훈의 사진을 보면, 집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오기 위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왼쪽부터 조지훈, 박두진 시의 목차, 오른쪽은 당시 매출표가 붙은 것으로 20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靑鹿集 以後』『靑鹿集 以後』
박두진 시인의 자전적 시론과 시 목차
시집 말미에는 세 시인의 '자전적 시론'이 첨부되어 있다.
시가 시인의 손에서 떠나면 객관적인 기준과 다른 사람에 의해 가치가 논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시나 문학 작품을 쓰는 사람은 늘 불편하다. 박두진도 그런 사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자전적 시론들은 세 시인을 논하기 위해서 피해 갈 수 없는 중요한 해설이다. 많은 비평들이 빚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이 시집에 오면 세 시인의 시들은 각자 관심을 가지는 방향이 달랐다고 말하지만 박목월과 조지훈에게서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박목월은 시 <하관>에서 '형님', 시 <모 일>에서 '시인', 시 <가정>에서 '아버지'라는 짊어진 존재의 비애를 한 번쯤은 벗어나고 싶어 '당인리'라는 현실 공간을 꿈꾸면서도 그 의무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당인리는 그의 현실속 이상향이었다.
조지훈에게는 전쟁이란 시대적 배경이 따라올 때 절망적인 슬픔도 함께 겪지만, 그는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슬프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