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이 기억나지 않는다

by 청귤



스물일곱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바닥을 쳤구나를 거듭거듭 경험했던 스물일곱. 그때 내 인생은 알을 깨고 나왔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그때부터 과거가 잘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원래의 나는 최초 기억도 무척 빠른 편이고 세세한 것들도 무척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드라마를 한 편 보면 등장인물의 모든 대사가 저절로 외워지는 수준. 공부할 때 암기를 잘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내가 실로 경험한 일에 있어서는 그 기억이 놀랄 만큼 정확했다. 그런데 스물일곱 살 무렵 과거의 많은 기억이 증발했고, 그 이후부터는 무언가를 경험해도 기억에 잘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스물일곱에 대해 말해보자면, 처음으로 나의 기능을 심각하게 위협받았던 해였다. 열한 살 무렵 부정적인 자아상이 확고해지면서 관계 안에서 늘 불안하고 위태로웠음에도, 나는 비교적 당차게 살아왔다. 그게 가능했던 건 나의 기능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 덕분이었다. 어딜 가서 무얼 하든 평타 이상은 거뜬히 해낼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 믿음에는 의심이 없었다. 나의 스물일곱은 그 믿음이 박살 난 해였다. 잘 해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체력이 부쳤고, 체력이 부치니 정신력도 약해졌다.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에 몹시 예민해지게 되었다. 복잡한 대인관계를 처리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서인지 타인의 매우 사소한 신호에도 과민하게 반응했다. 힘든 일은 몰아서 온다더니, 하필 그 무렵 정서적 지지자원마저 전무했다. 가족도, 애인도, 친구도 없었던 그때, 멍하니 누워서 모든 걸 놓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직면이었다. 어쩌면 그 직면 때문에 스스로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잘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도 같다. 늘 궁금했다. 왜 나는 늘 관계 안에서 남들보다 많은 트러블에 휘말리는 걸까. 누구나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한 것 같았다. 누구나 매번 따돌림의 대상이, 험담의 주인공이 되지는 않으니까. 열한 살 때 그 일이 없었더라면 내 성격도, 관계도 완전히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늘 궁금했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지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지난 15년이었다. 그 15년의 시간을 드디어 스물일곱에, 한꺼번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나만 몰랐던 나를, 누구도 알 수 없기에 나만이 알아주고 안아줘야 했던 나를.



내 세상이었던,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그렇게 갑자기 깨졌다. 15년이라는 시간이 한순간에 물밀듯이 밀려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이에 맞는 적절한 좌절을 이겨내며 한 걸음씩 성장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늦게나마 훌쩍 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알을 깨고 나오느라 힘은 바닥났고, 추웠고, 배가 고팠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내 세상은 전부 무너졌기에 새로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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