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가장 중요한 시절, 친구가 없었다

by 청귤



내 삶이 고달파지기 시작한 건 열한 살 무렵이었다. 왕따라는 사회적 용어도 없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당하는 게 따돌림인 줄도 몰랐다. 친구들 사이에서 겪는 일들이 혼란스러워 우물쭈물하는 내 말을 가로채며 "애들이 너 따돌려???" 하고 흥분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제야 알았다. 아, 걔네가 나를 따돌리는 거구나.



같은 반에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키도 반에서 제일 큰 여자아이가 있었다. 모두가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를 싫어했다. 그 아이가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자 그 아이 주변 친구들이 조금씩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는 대수롭지 않았다. 옷을 왜 저렇게 입었냐 하는 등의 시덥잖은 이유였다.



따돌림의 양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졌다. 어느 날은 집에 가야 하는데 신발주머니가 안 보였다. 모두가 하교한 텅 빈 학교를 돌아다니며 신발주머니를 찾아다녔다. 화장실 변기통에 처박힌 신발주머니를 발견하고는 신발주니를 주워 물기를 탈탈 털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또 어떤 날은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도시락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책상 옆에 걸어놨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가방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같은 반 아이가 “누가 네 도시락 가방을 폐휴지함 안에 버린 것 같다”고 알려줬다. 또 다른 날은 자리를 바꿨는데 하필 우리 조 모두가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었다. 조별로 행주산성에 견학을 다녀오는 숙제가 있었는데 도저히 같이 갈 자신이 없어서 따로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나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담임은 나이가 많고 기운이 없는 할아버지 교사였다. 엄마가 촌지를 갖다 주기 전까지 나에 대해 썩 관심이 없었다.



운이 나쁘게도 나의 초등학교 4, 5, 6학년은 계속 무정부상태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학기 초에 교통사고가 심하게 나서 거의 학기 말까지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6학년 때는 젊은 남자 담임이었는데 일 년 내내 수업을 거의 하지 않고 매일 체육을 하고, 본인 기분이 나쁘면 2주고 3주고 공포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큰일 날 소리지만 그때만 해도 그게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4학년도, 5학년도, 6학년도, 아이들의 복잡한 관계에 개입해서 교통정리를 해 주는 어른이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주는 어른도, 관계 안에서 소외되고 상처받는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어른도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더 힘들어졌다. 1학년 때는 소위 논다 하는 아이에게 따기를 맞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이가 제법 가까웠는데 점차 사이가 틀어졌다. 어느 날 방과 후에 학교 뒤편으로 부르더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 대 때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다'며 안경을 벗기고는 따기를 끝도 없이 때렸다. 2, 3학년 땐 외로웠다. 점심을 같이 먹는 무리는 있었지만 친구라고 할 정도로 썩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격 좀 있는 아이들은 만만한 나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방학 때 쌍꺼풀 수술을 하고 부기가 다 빠지지 않은 채 개학을 해서 놀림을 받던 여자아이가 돌연 내게 욕을 마구 퍼붓는다든지(그건 정말로 ‘돌연’이었는데,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뭘 보냐며 마구 욕을 쏟아부은 것이다.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특목고에 떨어진 아이가 대놓고 내게 못되게 굴고 뒤에서도 내 욕을 하고 다닌다든지 하는 식이었다(평소 그 아이와 어떠한 접점도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도대체 내가 그 아이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다. 참고로 나는 당시 특목고에 합격했다). 또래 사이에서 나는 그런 아이였다. 막 해도 되는 애, 함부로 해도 되는 애. 그래도 말 한마디 못하는 등신 같은 애였다.



다행히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교생활이 조금 편해졌다. 전쟁 같은 또래관계의 3년간의 소강상태였다. 성적이 곧잘 나왔던 나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특목고로 진학했는데, 입학해서 몇 달 지내보니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순하고 솔직했다. 관계 안에서 머리를 굴리거나 말을 만들어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아이가 없었다. 별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고 마음 편히 공부만 할 수 있었던 3년이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아이들이 편하고 좋았다. 밥 먹는 무리와 상관없이 학급 친구들 대부분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대학 생활은 일면 즐거웠다.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었다. 뭐든 열심히 했고, 하는 것마다 끝을 봤다. 과탑을 거의 놓치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가장 순수한 사랑도 그때 했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열정적으로 놀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목표를 성취해 내는 것과 관계라는 거미줄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은 별개의 능력이었기에.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그늘이 있었고, 한 번씩 이유 모를 눈물이 터질 때면 하루 종일 울어야 했다. 그리고 늘 죽음을 꿈꿨다. 스스로를 또렷이 보지 못한 채 여기저기 부딪히며 앞만 보고 걸어왔던 지난 십수 년간 방치된 혼란과 쌓여온 상처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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