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고. 그냥 좋다고. 너무 좋다고.
친구 N과 함께 이든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조금 오랜만에 갔는데 귀퉁이에 웬 커다란 박스가 3개 쌓여있고, 그 박스에는 펭귄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오빠, 이 박스들 다 뭐예요?
그거 펭귄클래식 150권 세트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차가웠던 뺨에 막 온기가 도는 게 느껴지면서 분홍분홍 해지는 게 이리 설렐 수 있나 싶게 무지 콩닥콩닥하고 궁금하고 손에 자꾸만 닿고 싶고 그랬더랬다. 남자가 아니라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구나 싶었던.
오빠, 맨 위 박스 하나만 열어봐도 돼요?
어. 열어봐.
박스 안에 책이 잔뜩 들어있었다. 내 책도 아닌데 내 것처럼 너무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한 권 한 권 열어서 휘리릭 해보고 종이도 만져보고 냄새도 킁킁 맡아보고 어떤 책이 있나 하나하나 꺼내봤다. 그중에는 내가 읽은 책도 있고 곧 읽을 책도 있고 좋아하는 책도 있어서 신났다. 마침 손님도 우리뿐이었고 내가 너무 흥분하니 오빠는 이 참에 책 정리를 해야겠다 싶었나 보다. 너무 신이 나서 박스를 뜯고 번호별로 순서 정리해서 오빠한테 전해줬다. 그래서 저렇게 창 위에 공간에 순서대로 정리를 했는데 공간이 모자라서 한 박스(50권)는 못 봤다. 친구 N이랑 순서대로 정리하는데 너무 행복했다. 오빠는 장부 쓰고 대여도 해줄 거라고 하는데 과연 괜찮을지 모르겠다. 책이란 게 많이 읽히면 좋은 거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아니까 한숨이 나왔다.
오빠, 혹시 민음사 세계문학 구매할 생각은 없어요?
아니.
그거까지 구매하면 오빠한테 시집갈 뻔했어요.
친구는 빵 터져서 넘어가는 중인데 그 와중에 오빠는 참 싫었는지 반응조차 없다. 참나. 너무하네. 암튼 그 정도로 내가 흥분했다고 하면 변명이 되려나. 아, 책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허영심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왜 책이라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에도 집착을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장서가가 아니다. 근데 내 상황에 맞게 절제하는 것일 뿐이지 상황만 다르다면 내가 절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자책을 많이 보게 되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가지고 싶다'라는 단순하고 강렬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같이 잊을만하면 집이 흔들흔들하는 상황에 책이라는 것은 정말로 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사할 때도 힘들고, 또 어느 정도 공간도 있어야 하니까 그것은 여유로운 집을 갖고 싶게 만들고, 또 갖고 싶은 것을 가지는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은데 왜 그렇게 갖고 싶으냔 말이다. 큰집에서 좋아하는 책들에 파묻혀서 살고 싶다. 뭘 읽을지 이거 저거 고르고, 또 꺼내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책장 앞에 벌러덩 누워있고 싶다.
그래도 기쁜 게 있다면 내 주변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많고 적음을 떠나서 책을 멀리하지 않고 항상 가까이 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것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누군가가 책을 읽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어떤 책을 보느냐고 물을 때도 좋고, 그 책은 어떠냐고 물어볼 때도 신난다. 비록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책을 추천받는 것도 좋고, 왜 그 책이 좋은지 설명하는 상대를 보고 있는 것도 좋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두고 책만 읽는다 하여도 좋다.
좋다고. 그냥 좋다고. 너무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