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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토마토 Feb 28. 2024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하나만 선택하면 안 된다.

드디어 좋아하는 걸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1.

좋은 기회로 강연을 할 수 있었다.

4일 만에 대학 강연을 준비해 보자! 2024 홍익대학교 신기술 융합 디자인 취창업 특강
https://brunch.co.kr/@greentomato/8

강연 주제는 하나였다. '나 자신을 알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걸 해라.'

경험을 모아보면 경향이 나온다. 이 경향을 통해 나를 알 수 있다.

강연을 위해 내 경험을 쭉 나열하기 시작했다. 내 경험은 '새로운 것'의 기획이라는 경향을 띄고 있었다.

나는 UX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강연이 끝나고도 내 경험이 UX라는 경향을 띄고 있다고 확신했다.

더 많은 강연을 다니려니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이제 PDF로만 정리하기엔 용량이 버거워

아예 웹으로 다시 만들기로 했다. 프로젝트를 쭉 나열하고 내가 겪어온 경험을 다시 봤다.

난 누구지? 경험들에서 UX보다 더 큰 흐름이 보였다.


2.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들은 운동, 기타, 브이로그 등등 몇 가지 우물을 깊게 파고 있었다.

근데 나만 취미를 하나로 정의할 수 없었다. 내 취미는 뭐지?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취미가 너무 많고 얕아서, 그러니까 좋아하는 게 너무 많고 얕아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찬찬히 나열해 봤다. 하나의 키워드가 보였다. 동양의 문화.

그럼 나는 동양의 문화를 좋아하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동양 문화가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상당했다.

이번엔 내가 본능적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돈과 체력을 투자하는 게 무엇인지 살펴봤다.

내가 나열한 것들에서 너무 확실하고 거대한 흐름이 보였다. 바로 콘셉트 빌딩…!

파티를 할 때도, 워크숍을 할 때도, 여행을 갈 때도, 기획을 할 때도, 취미생활을 할 때도, 집을 꾸밀 때도…..

컨셉충은 콘셉트를 위해 시간과 돈과 체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취미는 콘셉트 빌딩이었다. 이름하야 세계관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3.

전 직장 동료를 끌어들여 스터디 목적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일요일 저녁마다 식당의 브랜딩과 마케팅을 고민하며 본업을 할 때와 달리 어떤 성취도 없지만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나는 콘셉트 빌딩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4.

그래서 작년에 했던 강점 찾기에서 나온 나의 상위 5개 강점을 다시 들여다봤다.

1) 집중(Focus) 테마
집중(Focus) 테마가 특히 강한 사람들은 방향이 정해지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진로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력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행동에 착수합니다.

2) 미래지향(Futuristic) 테마
미래지향(Futuristic) 테마가 특히 강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과 가능성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3) 개별화(Individualization) 테마
개별화(Individualization) 테마가 특히 강한 사람들은 각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성에 흥미를 느낍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협력해서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성취(Achiever) 테마
성취(Achiever) 테마가 특히 강한 사람들은 에너지가 왕성하며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들은 바쁘게 일하면서 생산성을 올리는 데에서 큰 만족감을 얻습니다.

5) 발상(Ideation) 테마
발상(Ideation) 테마가 특히 강한 사람들은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당시엔 개별화 테마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근데 콘셉트 빌딩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니 재미있는 콘셉트를 발견하면 흥미를 느끼며, 고유의 개성을 연결하고 구조화해서 경험으로 재생산하는 경향이 딱 저런 의미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고민이 시작됐다.

콘셉트 빌딩은 BX 아닌가? 나는 BX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BX를 하고 있는데 왜 UX를 하고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논리적 전개가 아닌 개념의 구조화였다.

존재하는 개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그걸 구조화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취미,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감정이 상당히 고양되어 있었고

자칫하면 퇴사 혹은 창업 등의 돌이킬 수 없는 즉흥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분야에 몸 담고 계신 교수님을 찾아뵙고 조언을 구했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위한 기준을 잡을 수 있었다.

 


먼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정의를 내렸다.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냉정히 바라보면 잘한다는 것은 혼자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능력을 객관화할 수 있는 비교군이 존재해야 '한다'에 '잘'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그냥 하는 사람이 아닌, '잘'하는 인재를 걸러내고 채용하기 위해 시스템을 설계한다.

나는 이 시스템에서 잘하는 것으로 필터링되고 채용되었다.

 또한 이곳은 이런 '잘'하는 것을 낱낱이 평가해서, 돈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가치로 환산해 주는 시스템이 그 어느 기업보다도 잘 갖춰져 있는 곳이다.

여기서 내가 평균 이상의 평가와 자원을 받는다면, 나는 잘한다는 것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나는 UX를 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좋아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만큼 신경 쓰인다. 교수님이 내게 브랜딩이 무어냐, BX가 무어냐고 질문 주셨을 때

나는 명쾌한 답변을 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UX관련 대화에선 자신감이 붙어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인간은 다양한 창구로 경험을 습득하는데, 가장 절대적인 습득 경로는 시각이다.

'BX'는 가시화되고 체감되는 콘셉트가 정말 중요한 영역인 데 반해,

UX는 경험을 구조적으로 설계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직관적 습득이 어렵다.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직관적 영역의 호불호는 확실히 선언할 수 있는 데 반해,

무의식적인 종합적 경험은 확실히 정의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BX를 더 자주 직관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접하기 때문에 예민라이트를 켜고 경험하는 UX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BX는 좋아하는 만큼 예민해지진 않는 수준에 불과했다.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내가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인지하고 고민한 부분이 뭔지 되새겨봤다.

메뉴판의 정보 구조, 디스플레이 방식, 테이블에

들어가지 않고 삐걱대는 의자, 음식을 받아 자리로 가고 다시 반납하는 순환 동선...

디저트와 인테리어에 적용된 요소는 예쁘다고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넘기고 곧바로 사용자 경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잘하는 것 : 콘셉트 발굴, 구조화, 그리고 이것들을 통합한 경험 디자인

좋아하는 것 : 콘셉트 디깅

하고 싶은 것 : 콘셉트빌딩으로 경험을 전달하는 것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나는 BX라는 직업군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끊임없이 아이데이션 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콘셉트'의 '구조화'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콘셉트의 구조화는 BX에 더 많이 요구되겠지만, 사실 디자인이라면 어느 분야에든 적용될 수 있다.

이분법적으로 콘셉트 빌딩은 BX야! 나는 BX 아니면 UX를 선택해야 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불안한 심리의 인간은 안정을 찾기 위해 가장 안정적인 극단을 선택한다.

3년 차가 되어 성장과 경쟁의 길목에 서있던 나는 불안했다.

스스로를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것을 하고싶은 욕구가 강했다. 

내 작업을 하고싶어 매일매일 고민하다보니 BX를 해야 한다는 비약에 이르른 것이다.


물론 나는 브랜딩이 좋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고민해 보면, 좋아하는 것 중 하나만 파는 극단적 전문성을 띤 인재가 아닌, 

융합형 인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잘하는 것에 좋아하는 것을 녹여낼 방법을 찾으면서,

또는 좋아하는 것에 잘하는 것을 녹여낼 방법을 찾으면서.



잘하는 전공지식을 가지고,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친구를 보며

경쟁하지 않는 것이 경쟁력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감정적 판단을 내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기보다,

경쟁을 피해 가기 위해 이성적 판단을 내려 잘 갖춰진 것으로 새로운 협상 테이블을 꾸릴 수도 있는 것이다.

경향으로 좋아하는 걸 찾고, 좋아하는 걸 하라는 인생 첫 강연을 나에게 깊게 적용해볼 필요가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둘을 함께 할 고민을 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하나만 선택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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