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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zero Apr 21. 2024

생필품의 범위란

    먼저 비자가 나온 남편이 일본으로 가서 집을 구했다. 한인 부동산에 연락해서 먼슬리 맨션을 계약하고, 구역소(区役所, 한국의 구청에 해당한다.)에서 전입 신고를 했다. 은행에서 일본 계좌를 만들고, 휴대폰 매장에서 일본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그 후 다시 가족이 일 년 동안 살 집을 알아봤다. 주거와 신원이 확실한 외국인에게 일 년 이상의 장기 렌털이 가능해서였다.


    이렇게 쓰니 간단한 듯 하지만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려웠다. 아무리 한인 부동산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집을 책임지는 관리회사와 통화를 해야 하고, 전입신고, 은행업무, 휴대전화 개설 등은 부동산과 무관하게 홀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보이스톡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남편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응원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일본 부동산에 대해 알지 못하고, 경험도 없는 내가 무슨 조언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다행히 남편을 초대해 주신 한국인 선생님이 며칠 동행을 해주셔서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지금도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집을 구했다. 그 후 남편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짐을 들고 온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남편 홀로 했던 그 무시무시한 과정들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나와 아이의 출입국 관리소 통과하기, 재류카드 받기, 구역소의 전입 신고, 일본 휴대전화 개설을. 아, 추가하면 아이의 학교 입학도 남았다.


    아무튼 이 정도로 일본 이민 초창기 업무가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아직 중대하고 엄청난 일이 하나 더 남았다. 그렇다, 집을 구했으나 집이 빈 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풀옵션은 고사하고, 기본 옵션도 없는 집. 한국 아파트에 기본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없었다. 심지어 형광등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형광등은 없는데 유일하게 에어컨이 달려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민가방을 이고 지고, 비싼 돈을 들여 항공택배를 7박스 보내서 일본에 왔는데, 집이 휑해도 너무 휑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채워야 할까. 텅 빈 집을 봤을 때의 먹먹함이 아직도 선명하다.


    방 두 개와 거실 겸 부엌, 화장실과 베란다가 있는 집이었다. 집이 좁아서 큰 가전가구는 필요 없지만 꼭 필요한 생필품이란 게 잊지 않는가. 세탁기와 냉장고, 식탁 겸 탁자, 책상으로 쓸 수 있는 다용도 식탁과 의자가 필요했다. 텔레비전 겸 모니터를 올려놓을 장식장과 작은 책장도 있어야 했다. 방 하나가 다다미여서 침대 대신 바닥에 깔 두꺼운 매트리스도 사야 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다미방의 두꺼운 매트리스는 곰팡이와 습기를 유발한다. 자주 매트리스를 들어 청소하고 환기를 시켜줘야 하기에 접는 매트리스, 또는 얇은 매트가 사용하기에 더 적합하다.)

    한국에선 택시 타기가 수월하고 운전을 해서 이동이 편했는데 여기선 해당되지 않았다. 교통비는 또 왜 그리 비싼지.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상점에 가야 하니 한 번에 많은 물건을 사 오기가 어려웠다. 그래, 직접 구매가 어렵다면 온라인 상점을 이용하자.


    그렇게 방향을 틀었는데, 아뿔싸. 우리 집에 인터넷이 안 된다. 휴대폰 개통하면서 인터넷 신청을 같이 했는데 2주일이 걸린단다. 겁나 빠른 인터넷 천국에서 살다가 인터넷도 안 되고, 인터넷 개통도 느린 이곳에 오니, 차암. 그래 이럴 거 알면서 자발적으로 온 것 아니겠는가. 화내지 말자, 울화통 터지지 말자, 씩씩 거린다고 해결될 일 아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을 다독여 본다.

    결국 인터넷을 하기 위해서 온 가족이 버스를 타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커피 두 잔, 사과주스 한 개 사서 테이블에 앉았다. 인터넷이 된다. 무료 인터넷이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남편이랑 구글을 켜서 아마존 재팬에 가입했다. 간단한 한자는 읽어도 자세한 내용은 해석하기 어려워서 번역기를 돌렸다. 필요한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역시나 아마존재팬 프라임에 유료가입해도 쿠팡 배송에 비해서는 느리겠지만,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한다.

    가전제품은 카탈로그에서 사양과 크기, 가격을 본 후, 매장으로 직접 갔다. 실물을 살펴보고 직원에게 손짓발짓눈짓해 가면서 설명했다. 역시나 만능 파파고가 있었기에 물건 주문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이제 집 정리가 끝냈을까? 아늑한 스위트 홈이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직 숟가락, 젓가락, 주걱, 국자, 도마, 칼, 수세미, 설거지용 세제, 행주, 15cm 프라이팬, 26cm 프라이팬과 뚜껑, 주물 냄비, 뚝배기, 주방용 가위, 뒤집개, 집게, 테이블 매트… 샴푸, 린스, 수건, 성인 치약, 어린이 치약, 칫솔, 화장실 청소 세재, 변기 청소도구, 빨래 세제, 섬유유연제… 화장실용 휴지, 물티슈, 갑 티슈, 걸레, 물청소용 걸레… 등등이 더 남았다.


    나는 이곳에 오면 심플 라이프를 즐길 줄 알았다. 간단하고 간소하게 일 년을 살다가 홀가분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왜 사야 할 물건 목록이 끝없이 나오고 돈은 줄줄 나간단 말이냐.

    언젠가 읽은 책에서 톨스토이가 물었다.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그 질문을 조금 바꿔서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일본 일 년 살이에는 얼마만큼의 생필품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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