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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10. 2018

안갯속 방향성을 잃은 현대인의 초상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강원도 산골 어느 국도를 달리다보면 안개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끼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럴때마다 참 당황스러운게, 앞차의 비상등조차도 보이지 않아 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것인지, 내가 가는 곳이 올바른 곳인지 애태우며 얼마 만나지 않은 애인의 허리를 감싸안듯 오른발에 모든 감각을 살려 엑셀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모자라 옆사람에게 앞에 차가 있는지 잘 보라며 잔뜩 겁을 주기도 한다. 머릿 속은 하얘지며 온 몸의 모든 땀구멍에서 '이때가 기회다!'라며 열심히 그것들을 배출해내기 시작한다. '언제쯤 끝날까 …. 언제쯤 겆힐까 ….'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며 핸들을 잡고있는 두 손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는 그때.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듯 겆히며 다시 쾌적한 국도의 길을 선사하는 것이다. 
            

안개 속 나는 우두커니 서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안개는 방향성을 잃게 했다


  김승옥이 선사하는 무진에서의 삶도 그렇다. 특산품은 없지만, 안개가 특산품이라는 무진에서는 방향성을 잃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안개가 특산품이 되어버린 그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전혀 그 방향성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이 안개속을 벗어나보겠다는 그 일념 하나 뿐이다. 이 안개속에서는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한 방향추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오직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에게 나를 꺼내달라고 애원하는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테니까 절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그렇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이 반드시 좋지도 않더군요. 책임, 책임뿐입니다."
"그렇지만 여긴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인걸요, 하여튼 서울에 가고 싶어요. 절 데려가 주시겠어요?"
"생각해 봅시다."
(무진기행, 28)


  안갯속에서는 내가 가야할 목적지를 알 수가 없다. 동(東)이면 동. 남(南)이면 남이건만, 안갯속에서는 내가 가는 방향이 동(東)이 되고, 남(南)이 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그 방향이 된다. 혹자는 '내가 방향을 개척하는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고, 주체적인 선택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은,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동서남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허한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것이다. 우연히 그 길이 들어맞아 내가 가야할 곳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돌아갈 길에 대한 막막함과 허무함은 인간을 좌절시킬 수 밖에 없다. 

  김승옥 작품의 주된 핵심은 이곳에 있다. 단편의 주인공들은 모두 무진의 안개에 갇혀있다. 자신의 방향성을 모두 잃었다. 자신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지를 잃은지 오래다. 「서울 1964년 겨울」의 등장인물들이 통금전 밤을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떠도는 모습은 그 모습을 상징한다. 또한 김승옥 작품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정처없이 이리저리 길을 떠도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그 상징을 더욱 강화한다. 그렇게 그들은 안갯속에서 자신의 짝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삶에 어쩔수 없이 순응해버리게 되는것이다. 자신의 삶에 어딘가 이상한 모순점을 느끼면서도, 이것이 원래 자신의 삶이었음 양,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어딘가 이상한 모순점을 느끼면서도, 으레 이것이 원래 나의 삶이었음 양, 어깨 한번 으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보일 안개를 탈출 할 수 있는 그 점을 기다리며.


안은 눈을 맞고 있는 어느 앙상한 가로수 밑에서 멈췄다. 나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김 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울 1964년 겨울, 67)


인간의 죽음 앞에서 모순점을 느끼지만 "하여튼, 재미많이 보라며" 막차를 기다리는 모습은 안갯속 우리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편집자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단편의 구성중 「무진기행」이 가장 앞에 나온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진기행 이후에 나오는 「생명연습, 서울 1964년 겨울, 건(乾), 역사(力士), 차나 한잔, 다산성,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서울의 달빛 0장」모두 등장인물들은 무진의 안개에 갇혀있다. 어딘가 답답하고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은 그것을 일탈행위라는 우연성에 기대 출구를 찾아그 무진의 깊은 안개를 벗어나보고자 아둥바둥 힘쓰는 소시민(小市民)인것이다. 근대의 시대적 상황도 물론 그들의 모습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국가도 무진의 안개에 깊게 쌓여있던 시절이었다. 격정의 60년대는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무진의 안개는 특산품을 넘어 전(全)국가적인 사상이 되어버렸다.


일탈을 통한 무진에서의 탈출은 가능한가


  등장인물들의 일탈은 기존의 무진의 안개에 빠진 매너리즘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한다. 무진으로의 여행과 이어지는 외도, 빨갱이 시체 구경하기, 강간 모의 묵인하기, 차에 발정제 타기, 자살한 시체를 놔두고 귀찮아질까 도망가기와 같은 일상에서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비도덕적이면서도 불법적인 행위의 연속성을 띄고 있다.  그들의 일탈의 첫 시작은 분명 떨리고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듯 했으나 그 결과는 더 큰 안갯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으로 종료된다. 자신의 마음에서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나 숙고 끝에 그들의 행위는 '묵인', '묵과', '무시' 등으로 나타난다.

  일탈은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의 뜻을 소유하고 있다. 즉 그 어원을 잘 숙고해본다면 원래 그들에게는 안개가 부여한 정하여진 영역이나 본디의 목적이 있었음이 암시되어진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일탈은 절대 무진의 안개를 탈출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일탈이 무진의 안개를 탈출했다는 소문이 들린다면 그것은 아마 '개혁'이라는 단어로 일컬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하여진 영역, 본디의 목적이 있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빠져 벗어나는 행위는 안개를 탈출하는 행위가 아닌, 그 안개에 더욱 잘 적응한자가 안개속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장난일 뿐이다. 즉 앞선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일탈을 통한 '탈출'이 아닌, 일탈을 통한 '안갯속에서의 자유로움'을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일탈 행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진열장을 두리번거리면서, 흥분제 있느냐고 대답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루약은 성공적으로 음료수에 용해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무 소식이 없었다. 
(역사(力士), 148-151)


  「역사(力士)」에서 주인공 '나'는 시간대별로 시스템화 되어 있는 하숙집의 모습에 이유없이 이것을 깨어보겠다는 오기에 발정제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일탈을 시도하고자 한다. 일탈을 통하여 그들의 시스템을 뭉개겠다는 그의 생각은 자신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철저하게 진압당하고 만다. 주인공 '나'가 무진의 안개를 탈출하고자 하는 방법은 매우 자극적이고 신선한 '일탈'이었으나, 근본적인 목적성이 부재한 일탈은 언제까지나 일탈로 종료될 수 밖에 없을을 철저하게 김승옥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은영 作, '아무도 당신의 외로움엔 관심없다'


혼란한 삶의 그 자체, 현대 '김승옥'


 김승옥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은 근본적으로 어떤 행위에 대해 판단도, 분노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일탈은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승옥은 그들에게 어떠한 천벌을 내리지도, 작가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주입시키지도 않는다. 오로지 김승옥은 안갯속에서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판단하는것은 유보하여 독자들에게 오히려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는 점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 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


  혼란한 삶의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힘들고 괴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떠한 행위도 의미의 해체를 부르짖는 현대에 김승옥은 반세기 먼저 이러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안개와 같은 화법으로 이것을 풀어내었다. 후대, 그러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그렇다면 이것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고찰해봐야 한다. 왜냐. 안갯속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반세기를 앞선 김승옥의 인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1960년대를 살아가던 '김승옥'이기 때문이다. 년도만 2018년도로 바뀐 무진의 안갯속을 헤메는, 발정제를 넣는, 물질을 살아가는 …. 우리, 아니 나는 인간 '김승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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