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기다림이라는 놈은 참 고약하고 미묘한 놈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도 무언가를 '기다린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때부터 가슴 한켠에서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왼손에 찬 손목시계 밑 부분에 땀이 그득하게 차는게 느껴지며 평소에는 차던지 말던지 신경도 안쓰던 손목시계에 그 눈을 떼지도 않고 기다림의 대상이 올 장소를 여우같은 눈으로 야리게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약속된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아직도 나타나지 않다니, 예의가 없구만!' 이라고 생각해버리게 되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이처럼 고약한 놈이다.
삶을 살다보면 참 많은 기다림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의 역전을 기다려보기도 하고, 언젠간 나에게 오 꽃이 되어줄 한 사람을 기다리기도 한다. 때로는 그 기다림에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극적인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은, 이루어지겠지' 라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동쪽에서의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치열한 삶을 살고나서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이루어지지 않은 고약하고 미묘한 놈인 기다림을 원망하는 것. 때로는 그것이 역설(逆說)적으로 우리의 삶의 모태이며 우리의 삶의 에너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만 그 기다림에는 셀수없는 시간들의 지루함과, 아픔들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작중 주인공들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하 각각 디디, 고고)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린다. 삐쩍마른 나무 한 그루와, 쉽게 앉을 만한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정도의 황폐한 언덕위에서 그들은 '고도'를 만나기로 했다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책을 읽다보면, 글을 읽는 독자도 답답해 대체 언제쯤 오는건지 싶을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 무료함과 언제오겠다는 말도 없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무력감은 독자도 책을 읽다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읽고있는가?, 이 두명의 바보가 하는 시덥잖은 말 장난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하는건지?'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게 만들 정도다. 그들은 왜 고도를 기다리는가. 그들은 자신의 귀한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황폐한 언덕에서 자신의 인생을 죽이고 있는가. 그들은 왜 의미없는 대화와 행동의 반복만을 취하고 있는가.
에스트라공: 어디로 갈까?
블라디미르: 멀리 갈 순 없지.
에스트라공: 아냐, 아냐. 여기서 멀리 가버리자.
블라디미르: 그럴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내일 다시 와야 할 테니까.
에스트라공: 뭣하러 또 와?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리러.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고도를 기다리며, 제 2막 156p)
매주 사는 로또처럼, 막연한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를 이끈다. 고고와 디디, 그들에게는 고도가 그런 존재였다. 고고와 디디는 '고도'라는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다. 그들의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고도를 만나는 것' 이었으며, 이외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중 중후반에는 그들의 가장 주된 목적이 흔들리기 시작하며, 목적을 잃은 그들은 나무에 목을 매어보기도 하고(허무주의), 언덕을 벗어나고자 (말뿐인) 노력을 한다.
처음 그들이 고도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작중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분명 고도를 만나 무언가를 해결받거나, 의미를 가지고 고도를 만나고자 했을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도를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 이틀, 모레, 글피가 되자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꼭 고도를 만나야 한다는 확고한 목적이 옅어지자 그들에겐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행동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작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쉴새없이 자신들이 방금 했던 행동과 발언들을 까먹는 부분에 있다. 목적을 잃어버린 무의미한 행동은 가장 먼저 잊혀질 수 밖에 없다.
'내가 왜 고도를 만나고자 했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와 같은 발언 이후에 고고와 디디는 그 장소를 벗어나려는 '일시적인' 노력을 가미하지만 결론은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로 항상 마무리 한다. 근본적인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목적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하부항목에 대한 목적성을 갈구하니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왜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 고찰이 필요한데, 작중의 고고와 디디는 그러한 고찰 없이 매일같이 나무에 어떻게 하면 목을 잘 맬 수 있을까를 고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도 고고와 디디와 동일하다. 고고와 디디가 아무런 목적과 의미 없이 '고도'만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것 처럼, 우리는 막연한 '잘 될거야'라는 희망을 가지고 현대 사회라고 칭할 수 있는 '황량한 언덕'에서 살아간다. '잘 될거야'라는 '고도'를 만나기 위하여 언덕에서 하루, 이틀, 모레, 글피의 시간을 보내며 살아간다. 그런데 왜 잘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숙고는 잊어버린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는 승리자고,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라고 설명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위한 수단적 가치에 대한 욕심일뿐, 진정한 목적은 상실되어진지 오래인 사람들이 더 많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는 거다. 당신이 어떤 일을 악착같이 시작하고자 한다고 하자. 한번만 생각하고 시작해보자는 거다. '고고'와 '디디'처럼 고도를 기다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이것을 통하여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한 대답을 '행복'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이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의 추구고 이를 이루는 것이라면, 왜 물질적인 부를 이룬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길로 떠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도 동시에 분명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번다는 '하위 목적'에 당신의 삶은 매몰될 수 밖에 없다. 어느샌가 내가 자본을 나의 목적에 맞게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나에게 목줄을 채워 끌고 가는 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바로 '목적의 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위 목적을 아무리 갈구하고 채워봤자 궁극적인 목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궁극적 목적의 해체가 이루어지는 순간, 세상은 질서없는 허무주의와 끝없는 카오스의 세계에 빠져들수 밖에 없다. 반대로 궁극적인 목적이 존재하는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글을 작성하며, 다시 한 번 무엇을 위해 '책'을 읽기로 했는지 궁극적인 그 목적을 상기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궁극적인 그 목표. 바로 이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기 위한 그 첫번째 발걸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은 결코 인간 중심주의로 마구잡이로 때려죽이고, 필요이상으로 충족하라는 명령이 아니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은 세상을 더욱 사랑하여 충만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며, 생육하게 하여 열매맺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여 더욱 풍요롭게 하라는 말씀이셨다. 적어도 내가 책을 읽고, 생각하는 이 행위는 무의미하고, 단순히 이 세상에서 내가 뛰어난 위치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닌, 세상에 더욱 기여하고, 이를 통하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 세상이 더욱 열매맺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된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당신의 오늘은 어떤 목적에 의해 이끌어져 왔는가. 목적이 당신을 끌어가고 있는가, 당신이 목적을 끌어가고 있는가. 선택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이왕이면 그 목적에 나의 시간과 인생을 맡겨보자.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며', 결국 '고도'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고도'와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상상해보자, 그 아름다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