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치열한 삶속에서 꿀맛같은 주말의 휴식을 보낸자도 있을 것이고, 내일의 해가 뜨기전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자 무엇 하나에 열중한 자도 있을 것이다. 전자이던 후자이던 간에 오늘의 삶을 살았던 당신은 어떤 '이상'을 하나 쯤 가지고 살아갔을 것이다. '이상'이라 하면 매우 거창한 단어일 수 있지만 당신과 나, 우리는 분명 자신만의 '이상'을 조각하며 살고있다.
삶은 참 고단하고 힘들다.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다 라는 말 처럼 일주일동안 열심히 나의 부품을 굴리다 보면 어느새 투덜거렸던 월요일의 하루부터, 가슴떨리는 퇴근이 기다리는 금요일의 한 주가 지나가며 '젠장, 한것도 없는데 벌써 한주가 지나갔잖아' 라고 중얼거리는 식이다. 조금 더 기계를 돌려야, 나의 그 '이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것만 같은데, 언제쯤 우리는 우리의 '이상'이라는 조각품을 완성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완성은 할 수나 있는 걸까.
거대한 대저택, 매일같이 파티를 위하여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향연, 유명인들의 공연과 함께 북적이는 정원의 모습. 개츠비의 성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상'의 실현이다. 주목할 점은, 이 파티의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개츠비의 얼굴을 본적도, 개츠비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단지 지금의 이 시간을 즐기면 된다는, 이 파티의 성격, 의도 따위를 알 필요는 전혀 없다. 왜 열리는지, 왜 개츠비라는 사람이 자신의 돈을 이렇게 펑펑 쓰는지에 대한 고찰은 전혀 존재 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이 이 무리의 일원이며, 먹고 즐기며 자신이 상류층의 한 축을 맡고있다는 공허한 상상에 그들은 러쉬-아워의 교통행렬을 뚫고 오는 것이다.
흰 야회복을 입은 네 명의 사내가 흰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술에 취한 여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들고 인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 들것 가장자리 밖으로 축 늘어져 있는 여자의 손에서는 보석들이 싸늘하게 반짝거린다. 사내들은 엄숙하게 어떤 집에 들른다. 집을 잘못 찾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츠비, 제9장 249p)
하지만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단 한 사람도 러쉬-아워의 교통행렬을 뚫고 오지 않는다. 자신과 연계된 꺼림직한것에 대해서는 '일이 바쁘다'라거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일관한다. 권력과 물질의 이득이 가득했을때의 그들은 자신의 모든것을 제쳐놓고 파티에 참석했었다. 자신의 삶의 모든 목적이 그 파티에 있는 것처럼 달려왔다. 하지만 그 파티를 주관한 개츠비의 싸늘한 주검 앞에 단 한명만이 찾아올 뿐이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한 여자 '데이지'도 그 예외는 아니다. 개츠비가 자신 앞에 영화와 같이 등장하자 모든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것만 같이 이야기하던 그녀 데이지는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자 폭주하고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 시점부터 그녀의 인생에서 개츠비는 사랑의 대상에서 이용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지도 않는 자신의 남편 '톰'과 그날 밤 침묵을 작정하고 떠나버린다. 그렇게 개츠비는 갈곳 없는 방아쇠의 목표물이 되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개츠비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의 인생을 같이 할 여자라고 생각한 데이지와 '이상(理想)'이 같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은 그 이상은 '이상(異想)'이었다. 앞과 뒤가 다른 생각을 가진 그들의 모습은 '이상(異常)'하고, 역겹다. 그래, 이상(理想)의 이면(裏面)은 이상(異常)한 것들로 가득차있다.
"난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마법이오.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달해주려 했어요. 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中, 블랑쉬가 미치와 이야기하며)
이상이라는 말을 '나에게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 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그 삶이 진실이어야만 하고, 행복해져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개츠비도 그러했다. 자신이 진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데이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현재의 삶과 부를 더 나은 방향으로 소비하지 못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 그 속에서 자신의 옛 연인이 찾아오지 않을까 라는 이상속에서 그에게 파티와 막대한 부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개츠비와 블랑쉬는 어찌보면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블랑쉬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미치에게 온전한 사랑을 구했으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사랑을 통한 이해를 구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불을 키는것에 대해 초조해 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개츠비도 자신에게 주어진 그 진실에 대해서 긍정하며 살아 갔으면 어땠을까.
그러므로 '나에게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은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진실'이라는 실재속에서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을 '이상'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것이지, 자신의 편협한 사고와 세계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들을 '이상'에 의한 목적론적 사고라고 칭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겁한 변명이며, 끝없는 자신의 자위일 뿐이다.
살아있다는 괴로움은 우리를 쉴새없이 취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진실이어야만 하는 삶'에 취할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쓰기만 한 '진실'을 들이켜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아편은 효과가 지속되는 그 순간에는 절정의 쾌락을 즐기게 하지만 그 쾌락에서 깨어나면 극도의 고통과 현실의 절망감을 맛보게 한다. 모든것에는 그 이면의 모습이 존재한다. '진실이어야만 하는 삶', 그 이면은 현실이라는 우리의 삶이 있다. 아편에 취해 살아가는 우리 삶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고 진정한 '이상'을 소유하며 살아가는것이 더 옳은 삶이 아닐까. 자, 우리네 인생을 위해 한잔을 들자. 당신은 무엇을 마실텐가, 개츠비의 달콤한 한 잔인가, 현실의 쓴 맛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구절이 떠오르는 밤이다.
"그는 우리들이 이곳에 와있는건,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진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어. 우리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비뚤어진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거야. … 우리에게도 아주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걸 안다는 거지." (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