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고
깊고 푸른 강, 그곳을 보면 타인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깊고 푸른 강은 일반적으로 평온과 평안을 상징하지 않는가. 웅장하고, 자연 생명의 태동이 일어나는곳, 그곳이 일반적인 푸른 강일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것이 '깊은'강 이라는것을 놓치면 안된다. 깊은 강은 한번 빠지는 순간 빠져나올 수가 없다.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곳에는 햇빛 한점 비추지 않기에 푸르렀던 그 색깔도 사라지고, 평온함 밑 그 어두운 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해진다.
왜 그런말이 있지 않는가, 좋은 일이 오면 언젠가는 나쁜일이 온다고. 나쁜일이 오면 언젠가는 좋은일이 온다고. (혹자는 그래서 좋은일이 오면 언젠가는 나쁜일이 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것인지, 나쁜일이 오면 언젠가는 좋은일이 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것인지 고민이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즉, 평온함과 평안함의 그 이면에는 언젠가 올 그 악재를 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늘 존재하고 서려있다는 것이다. 평온과 괴로움은 종이 앞뒷면과 같이 항상 붙어있으며, 그 한끗 차이를 서양에서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로 치환하기도 했던것 같다.
이 책의 저자 엔도 슈사쿠(1923~1996)도 그 평온함과 괴로움의 종이 한끗차이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 사람중 하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평생을 신과 구원에 대해서 고민할 만큼 그는 자신의 그 앞뒷면의 종이를 그 누구보다 고찰한 사람들 중 하나다. 종이를 뒤집어 보기도하고, 찢어보기도 하고, 그 나름대로 때로는 종이에 색칠도 해보며 그가 깨달은 그 무언가가 이 「깊은 강」에 모두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깊은 강은 평온함이었을까, 괴로움이었을까.
눈이 침침해져, 이소베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걸 망설였다. 자신이 죽은 뒤, 남편이 곤란을 겪지 않도록 모든 페이지에 일상생활의 지침을 하나씩하나씩 기록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 반드시 가스를 점검하는 것이나 욕실 청소법까지, 이런 것들은 지금껏 이소베가 죄다 아내에게 내맡긴 일이다. 그것을 아내는 손에 잡힐 듯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하란 말이야?"
그는 다실에 있는 그녀의 위패와 영정 사진 앞에서 소리 질렀다.
"언제까지 집안을 내팽개칠 셈이야 …… 어서 …… 돌아와." (깊은 강, 29p)
허허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마음의 공동을 메우기 위해 그는 되도록이면 회사에 남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었다. 잔업에 열중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일부러 식사며 술을 사 주는 걸로 울적한 기분을 대충 얼버무렸다.
괴로운 건, 귀가해서 아내가 쓰던 물건을 보는 일이다.
슬리퍼, 찻잔, 젓가락, 가계부나 전화번호부에 남아 있는 사소한 필적.
이런 것들이 눈에 띈 순간,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듯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한밤중에 잠이 깰 때도 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애써 아내가 옆 침대에 있다고 믿으면서,
"이봐, 이봐." 하고 말을 걸어 본다.
"이봐, 이봐, 자는 거야?"
결국 되돌아오는 건, 검은 침묵과 검은 공허감, 검은 쓸쓸함이었다.
"언제 여행에서 돌아올 셈이야. 언제까지 집을 마냥 비워 둘 작정이냐고."
그는 어둠속에서 눈을 감고, 눈꺼풀 뒤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디에 있나, 이 멍청아. 당신을 남편을 버려두고 무얼 하고 있어 …….
(깊은 강, 31-32)
극중 주인공중 한명인 이소베는 아내를 암으로 잃게 된다. 평생 같이할것만 같았던, 일상이었던 그녀의 존재는 어느순간 사라지고, 남은것은 그 죽음을 차근차근 준비했던 아내의 수첩밖에 없다. 영정사진 앞에서 어서 돌아오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젠가 한번 이별이라는것을 경험한 사람일것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쉽게 나올수 없는 그 무거운 분위기.
죽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익숙했던 것의 떠나보냄인것이다. 당연했던 아내의 아침식사와, 당연했던 그 편안한 시간들을 이제는 고독속에서 다신 오지 않는 그 당연함을 곱씹는것. 그것이 죽음을 받아드리는 우리의 비참함이다. 엔도 슈사쿠의 세계에서 죽음은 요란하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느껴지는 그 부재(不在). 그 부재를 몇 문장의 그 글로 느꼈던 사람이라면, 이미 엔도의 작품성에 대해 극찬할 수 밖에 없다. 결코 문장으로 담을 수 없는것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부분에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대체 엔도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가 말미에 예수와 힌두교, 인도의 묘한 조합으로 소설을 내어 등장인물인 오쓰의 이야기를 통해서 범신론 적인 이야기를 하는것은 또 무엇인가. 그는 과연 이 책을 통해서 신학적인 자신의 새로운 예수에 대한 이론(동양적 기독교)을 펼치고 싶어 했던 것일까. 정말 머리가 아팠다. 글을 쓰기전 다시 한번 빠르게 북마크들을 돌아보며 두번, 세번째 읽었을 때 무릎이 탁! 하고 쳐졌다.
작품을 읽다보면, 참 많은 현대인들에 대한 고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루세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이혼전후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현대인들의 타인에 대한 공감 부재, 타인을 사랑하는 척을 하면서 결혼과 관계를 반복하여 지쳐버려 무관심으로 응대하며 자신을 매몰시키는 모습. 가족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해, 우연하게 얻게된 구관조 한 마리에 자신의 모든 고민과, 애착을 털어내는 모습. 재물, 관계, 명예와 같은 모두가 부러워 할 만한 것을 추구하고 쟁취해 나가는 우리의 모습,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그로부터 오는 괴리감과 더 나은 세상과 관념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대 21세기 우리의 삶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것이라 할 수 있다.
야노는 아내의 마음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친구가 소유한 크루저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미쓰코는 그 옆모습을 보며 자신이 이남자와 보내게 될 생활의 이미지를 생각했다. 이걸로 됐어. 저렇게 흡족스럽고 단순한 얼굴에 나를 매몰시키면 돼. (79p)
이 문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현대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가정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뒤늦게 깨달은 많은 자들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가있다. 자녀는 크고, 자신은 늙어가는것을 보며 자신을 매몰시킨다. '과거에 그렇게 결혼하는것이 아니었는데 ….' 라며. 황혼 이혼이라는 최근의 경향을 보면 이러한 부분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가정에서의 부부간의 솔직함과 소통은 이미 단절된지 오래이다. 각자의 삶을 사는것이 더욱 중요하며, 가정에서의 의미는 깨어져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녀의 것이 된다. 그 자녀는 또 나이가 들어 같은 문제점을 안고 되물림 할 뿐이다. 관계에서의 책임감 없는 자유로움과 괜찮은 척 가면을 쓰는것은 결국 그 영혼을 파괴시킬 뿐, 천국으로 이끌지 않는다. 작중에서의 나루세도 그렇다. 결국 그녀의 결혼생활은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며, 자신의 이런 모습이 싫어 병원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척' 연습이라도 해보고자 애를 쓰는것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수많은 고민들을 안고 인도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작중에서 인도행 비행기를 탄다는것은 삶의 많은 문제점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해결하고자 영혼의 세계를 찾아들어가는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슈사쿠는 인도라는 곳에서 영혼의 세계를 찾아들어가 위로를 얻고자하는 그들에게 기적과 희망을 베푸는 모습들을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인도의 여신인 '차문다'와 같은 괴랄하고, 젖가슴이 아기들을 먹이느라 말라 비틀어질때까지 젖을 물리는 실제적이고 우리의 괴로운 삶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를 대변한다는 캐릭터인 오쓰조차도 수도원에서 쫓겨나고 갠지스강에서 시체를 나르며 가장 하찮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위로는 인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도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들을 가지고 떠난 4인방은 그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평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이라는 것은 가시적이고 유물론적인 행복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고난과 처절함, 사람과 사람과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부딪힘을 통해 얻게되는 작은 행복과 성장을 위해 존재함을 그들은 느끼게 된다. 결국 나루세의 경우 모두가 더럽다고 생각하여 기피하는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며 자신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게 되며, 진정한 평안을 되찾게 된다. 그렇게 진정한 평안을 되찾게 된 나루세는 지금까지 혐오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오쓰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되고, 소설 말미에 다친 오쓰의 소식을 물어보는것으로 그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표하게 된다.
엔도 슈사쿠가 신실한 가톨릭 신자라는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상의 내용들은 기독교의 '중생'의 과정을 동양식으로 풀어낸것이라고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기독교에서 중생이라는 것은 예수의 사랑으로 자신의 과거의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친의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의미가 아닌, 정말 과거의 옛 구습(舊習)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시야와 생각, 정말 다른 사람이 된다. 이전의 가치들은 전혀 무의미 하게 된다. 모두 그 사랑에 분노, 좌절, 열등감, 공허함 모두 깨끗이 흘려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치들을 붙들고 사회에 나가 더욱 강렬히 저항하게 된다. 삶의 무기력함에 저항한다. 삶의 공허함에 저항한다. 그것이 중생이다. 나루세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면, 그녀는 오쓰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문부호를 그 누구보다 찍으며 혐오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지만, 오쓰의 지속적인 타인을 위해 순수하게 고통받는 모습과 타인에 대한 사랑에 묘하게 끌리며 인도까지와서 오쓰를 만나게 된다. 결국 갠지스강에서 깨닫게 된 이후, 오쓰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오쓰안의 '양파', 즉 예수를 깨닫게 된 이후 숨이 끊어져가는 오쓰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달려가게 되며, 이는 타인의 일과 감정에 전혀 관심도, 동정도 없던 나루세의 과거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행동으로, 나루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은 힌두교의 브라만도 아니면서 …."
"그게 중요한가요? 만약 그분이 지금 이 마을에 계신다면."
"그분? 아아, 양파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양파가 이 마을에 들르신다면, 그이야말로 길가에 쓰러진 자를 등에 업고 화장터로 가셨을 겁니다. 마치 살아 있을 때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었듯이"
…
"갠지스강을 볼 떄 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278p)
최근 현대인의 삶은 각박하기 그지 없다. '함께'한다는 것에 대한 알러지와 같은 거부반응. 더군다나 괴로움을 함께하라니. 오쓰와 '양파'는 현대인의 기준으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는 미친놈들이다. 괴로운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의 고통까지 같이 분담하여 지라니 이건 미친짓이 분명하다. 작중 나루세와 많은 등장인물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오쓰는 삶의 방향성이 분명한 미친놈중 하나다. 어리숙한 바보며, 멍청이고 즐길줄 모르는 호구일 뿐이며 놀림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오쓰의 십자가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저 친구, 세상사는 법을 모르는구먼!' '조금만 모르는 척 해도 되는데 왜 저렇게 호들갑이야?' 라며 십자가를 지는 오쓰의 모습을 비웃기만 한다.
하지만 오쓰의 멋진 일갈은 그들을 벙찌게 한다. 그의 반문은 단순하다. 그런데, 무겁다 ……. 당신이 브라만도 아니지 않냐는, 나루세의 질문에 그는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반문으로 말문이 막히게 한다. 나루세는 오기로 반항해보지만 사회적 지식과 상식으로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삶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오쓰는 이어서 말한다. 모든것을 품고 받아들이는 갠지스강과 그에게 예수는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갠지스 강과 예수는 모두 가장 낮은곳에서 그 어떤 존재든지 품는 존재이다. 가장 불쾌한 고통을 함께하는 존재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3:24)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는 존재들 조차 품으며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예수와, 사회에서의 최하층, 인간대접도 받지 못하는 불가촉 천민부터 그 모든 사람들을 다 받아들이고 작은 희망과 믿음으로 몸을 맡기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하는 갠지스강은 엔도에게는 '아, 예수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것이라 생각이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깊은강은 평안함 이었을까, 괴로움 이었을까? 내 결론은 '깊은 강은 괴로움을 통한 평안함' 이라는 것이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안함 또한 존재 할 수 없다. 당신은 삶에 대해 과연 얼마나 솔직한가? 내가 들어야 하는 이 짐과 십자가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며, 도망가고 있지 않는가. 우리모두 그 결과는 알고 있지 않는가? 언제까지나 도망갈 수는 없다는것을, 그 누군가 한명은 이 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삶의 무거운 짐들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오쓰와 예수의 모습은 다시한번 내가 그 짐을 들며 강렬히 이 사회의 부정적 가치관들에 저항하며 괴로움속에서 작은 평안함을 발견해야 한다는 깊은 통찰을 얻게한다. 칠십평생의 삶을 살며 이 작품을 고안했던 엔도의 고민이 나에게도 이식되어 옮겨져 온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 언제까지 부재(不在)하는 것들에서 유(有)를 찾을 것인가. 이제는 새로운 생명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ㅡ 침묵의 비(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