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제를 써내려가다

by 그레곰

오랜 시간 영상 만드는 일을 주업으로 갖고 있었기에 떼제에서 한 달씩 봉사를 할 때에도 손에 카메라를 쥐고 촬영하기에 바빴다. 사실 떼제에 촬영을 할 생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재능을 좋은 일에 쓸 수만 있다면 기꺼이 봉사할 마음으로 떼제에 카메라를 늘 가지고 갔었다. 떼제 공동체의 신한열 수사님은 영상 제작에 관심이 많으셨고 떼제의 카리스마를 한국 사람들에게, 더 넓게는 아시아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게끔 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그동안 수많은 떼제 이야기를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었고 유튜브를 통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가끔 내 카메라를 신 수사님께 맡기고 떼제 생활에 집중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시간이 참 소중했다. 뭐, 굳이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푸른 잔디밭이 넓게 깔려있는 언덕 위에 앉아 노을만 바라봐도 좋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내 생각, 고민, 깨달은 것, 사람들과의 대화 내용 등 손바닥 만한 작은 수첩에 끄적거렸다. 그리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한번 쯤 떼제에서 있었던 일을 영상이 아닌 글로 남기면 어떨까하고 말이다.


떼제 Taizé. 언덕 위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떼제(Taizé)는 프랑스 중부 브르고뉴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천년도 넘는 시간 전에 프랑스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만들고 목축업과 작은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르고뉴 특유의 자연환경을 이용하며 포도주를 위한 포도를 가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작은 마을에 작은 씨앗이 심겨졌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씨앗이었다. 떼제에 발을 디딘 젊은 로제(Roger)는 훗날 이 씨앗이 전 세계로 가지를 뻗어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것이라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2천 년전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스위스 출신의 로제가 바라본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난 얼마 후 다시 세계 2차 대전이 벌어졌고 여러 정치적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세상은 왜 이렇게 아픈 걸까? 그는 세상과 자신에게 물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함께한 서방 국가들이 왜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지 가슴아파했다. 그래서 로제는 혼돈의 소용돌이 안에서 매일 화해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먼저 화해하자는 것이다.


로제는 프랑스 떼제에 정착하여 나치 독일을 피해 나온 유대인들을 숨겨줬다. 그리고 세계 대전이 끝나자 곧바로 독일군 포로들을 맞이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던 시기, 로제의 행동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로제는 떼제에서 공동체(Community)를 세우고 자신의 뜻을 함께 할 여러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1949년, 공동 생활과 독신, 단순 소박함을 수도자로서 살 것을 서약했다. 이렇게 떼제 공동체는 시작했다.


떼제 공동체 입구에 세워져 있는 종탑

처음에는 다양한 교파의 개신교회 신자들이 공동 생활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가톨릭 신자들도 이 공동체에 입회하였고 현재 정교회, 성공회 등 교파에 얽매이지 않은 초교파 수도 공동체(에큐메니컬 공동체)로 성장했다. 출신 나라도 다양하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모든 대륙을 망라하여 약 30여개국 출신 100여 명의 형제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가난한 지역에 파견되어 아주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2명의 수사가 서울 화곡동에서 지낸다.


사실 떼제는 프랑스 작은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장소에 국한한 이름이 아니다. 떼제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실현되고 있는 하나의 움직임(Movement)이다. 매주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아 화해의 정신을 배운다. 로제 수사가 시작한 수도 정신 곧 "네 이웃과 화해하라"(마태 5,21-26 참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운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떼제를 떠나 각자의 자리에서 화해를 실천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나 또한 그 많은 젊은이 중에 한 명이다. 오래 전부터 떼제를 접하고 떼제에 머물며 그 화해의 영성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내 갈 길을 떠났다.


내 인생의 여정에서 떼제를 만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떼제를 몰랐어도 내 인생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각자는 말로 표현 못할 만큼의 귀중한 인생의 여정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떼제는 인생의 여정을 조금 덜 지치게 해주고 가끔 목이 마르면 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킬 수 있게 해준다. 또 혼자 걷기보단 함께 걷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소소하지만 놀라운 내 체험들을 지인들에게 나누고 싶다. 이미 주변 친구들에게도 떼제 얘기를 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비단 그것은 종교적인-기독교적인- 체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폭력과 증오가 만연한 이 세상이지만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희망이 있고 따뜻함이 있는지 말하고 싶다. 물론 내 얘기를 꺼낸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내 얘기를 통해 한 명이라도 작은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지를 상상하며 써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