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번지, 수박색 대문

by 진담







30년 동안 서울 골목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온 사진작가 김기찬은 '골목길 풍경전집'에 이런 말을 남겼다.


"어렸을 적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뛰어놀던 골목을 찾는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 숲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우리들의 고향의 모습이 떠오른다.

삶이 힘겹고, 딛는 땅이 비좁고 초라해도 골목 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아끼는 훈훈한 인정이 있고,

끈질긴 삶의 집착과 미래를 향한 꿈이 있다.

이들은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생활 전통을 골목 안에 담으며 열심을 다한다.

나의 고향 서울, 아직도 빛바래지 않는 서울의 골목,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골목, 마음의 고향이다.

친근한 얼굴들, 그들이 엮는 온정과 사랑의 이야기를 영원히 남기고 싶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의 고향이 하나 있다.

짙은 수박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이 눈앞에 펼쳐지던 집. 나는 그곳에서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흐름을 보며 자랐다. 한여름이면 대청마루에 앉아 엄마가 손수 만들어 준 막대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동네 어귀 쌀집의 층계참에 앉아 종이 인형을 오리며 놀았다. 비가 그친 뒤 하늘에 곡선을 그리며 떠오르던 무지개를 동네 아이들과 바라보던 일도 있었다. 그런 장면들은 가끔 꿈속에서 조용히 다시 나타난다.


오래된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던 삐그덕 소리, 겨울이면 웃풍이 들어 늘 시렸던 내 코, 우리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모여 앉아 담요를 덮고 몸을 녹였다. 엄마는 연탄불이 꺼질까봐 새벽녘에 부스스 일어나 연탄아궁이를 살피곤 했다. 그 모든 기억은 소리와 냄새, 촉감 같은 감각의 언어로 내 안에 남아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와 남동생, 그리고 나는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별것 아닌 이야기로 웃었다. 장대비가 지붕 위에 쏟아지던 소리와 같은 시간 집안에 가득 퍼지던 수제비 냄새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향수로 남아 있다. 행복하기 위해 아주 사소한 것들이면 충분했던 날들이다.





초등학교 2학년 가을, 그 집이 있던 자리에 마당이 없는 단독주택이 새로 들어섰다. 포클레인의 기다란 팔이 지붕 위로 내려앉으며 집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한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눈을 수없이 지나온 그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고, 그 자리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먼지가 되어 남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집과 골목의 풍경은 내 마음속에 선명하다. 특별한 사건도 대단한 즐거움도 없었다고 여겼던 유년 시절이지만, 그 장면들은 이따금 아지랑이처럼 조용히 피어오른다. 마치 "너에게도 이렇게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라고 말해 주듯이.


할머니와 다니던 목욕탕, 골목을 가득 채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담벼락의 낙서.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기억들은 그림처럼 내 안에 남아 있다. 문득 그런 장면들을 마주할 때면, 책갈피 사이에서 붉게 말라있던 지난가을의 단풍을 발견했을 때처럼 반갑고 아련한 마음이 된다.


회색빛 아파트에서 반쪽짜리 하늘을 보며 사는 나는 마음이 환하게 빛나던 그날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글을 쓴다. 이른 아침, 학교 가자며 내 이름을 부르던 목청 좋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쩌면 작가 김기찬 역시 나처럼, 마음속에 남은 그 골목을 잃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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