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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Nov 09. 2023

회색을 짝사랑합니다.

"오늘도 나물 반찬이에요?"

"어. 건강에 좋아"


며칠을 했을까. 건강에 좋은 음식에 꽂혀서 그릇들까지 건강해질 판이었다.


"엄마 오늘 힘들어서 짜장면 시킨다"


반짝할 줄 알았다. 하나에 꽂히면 며칠 가면 긴 거다. 이런 자잘 자잘한 실패의 경험들이 쌓여 내 인생을 만들어 왔다. 내 기준에 모든 것이 실패였다. 계획대로 못했으니.


" 저 사람 10분 늦었어. 다른 것도 안 봐도 뻔해."

오늘도 한 사람이 아웃됐다. 내 기준에 조금만 벗어나면 리스트에서 지워 버린다. 그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었건 관심은 이미 없다. 좁은 인맥이 더 좁아지는 익숙한 순간이다.




 사주팔자는 4개의 기둥과 8개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 중 '나'를 뜻하는 글자가 중심에 있는데, 나는 '쇠(경금)'이다. 쇠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큰 역할은 자르고, 다듬고, 이기는 것이다. 내 삶이 딱 이래왔다. 수많은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고민을 하고, 상담을 받으며 왜 이렇게 사는지 원인을 밝히려 애써왔었다. 그런데 사주를 배우고 더 이상 왜 그런지 궁금할 필요가 없어졌다. 너무나 사주대로 살고 있는 내 인생에 허탈한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겁나고 무서운 사실은 앞으로도 이렇게 살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내가 스무 살쯤 메타 인지하고 혼자 쭉 살았으면 문제는 덜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미 마흔이 넘은 나는 엄마이고 와이프이기에, 삶의 전파력이 너무나 컸다. 맑은 물을 애써 길러 놓으면 까만 물감을 뚝뚝 떨어 뜨리는 존재 같았다. 많이 슬펐다.

 

 아무리 책에서 밑줄을 그어보고 외워본들 " 그럴 수 있어. 다음에 잘해보자."라고 말하는 내 머리 위에는 검은 구름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두 가지 메시지를 주는 엄마의 진심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고 눈치를 봤어야 했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벗어날 용기도 방법도 모르던 시간이 눈물과 같이 흐르기만 했다.




 



 몇 년 전, 나에게 새로운 대운이 왔다. 사람마다 타고난 운이 있다면 흘러가는 운도 있는데, 그 흐름이 10년 주기로 변화하게 된다. 새로운 대운은 눈앞에 깔린 안개를 싹 치워 주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 마치 전쟁통에 부서진 곳들이 안개가 껴서 아무 일 없이 보이다가, 안개가 걷히며 잔혹한 고통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남편도 아이들도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가장 멀쩡하지 못한 건 역시 나였다.


 눈앞에 현실이 아프지만, 잘 안 보여서 불안한 것보다 속은 편했다. 하나하나 고통의 상처들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아팠었을 아이의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동안 안 나갔던 성당도 아이들과 함께 나갔다. ( 이 시점에서 뜬금없이 고백하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이다. ) 운동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에너지를 조절하기도 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흑백의 생각들을 다듬어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앞서 나의 성향을 밝혔었지만, 흑과 백처럼 극단적으로 움직이다 접어 버린다. 대운이 바꿔도 타고난 기질은 안 바뀌고 펄떡펄떡 살아서 나를 힘들게 했다. 어느 날 인연의 흐름을 따라가다 슬초브런치 프로젝트를 만나게 되었고 반짝 타버리는 불꽃같은 나를 잡아끌고 가줘서, 지금 여기 내가 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 회색 공간과 같았다. 마치 물감처럼 흑과 백을 섞어 쓰다 보니 회색이 되어 갔다. 처음 글을 쓰며 회색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었고, 이곳에서 나는 안전하게 숨어 숨 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회색이 되는 순간은 그 어떤 것도 정답이며 정답이 아닌 애매함을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원히 이곳에서 다른 캐릭터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만큼은 흑과 백이 아닌 회색의 향을 숨쉬며 사랑하고 싶다.

 

grey 수. 내가 사랑하는 이름.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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