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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Dec 13. 2023

1등이 나쁜 이유

우리에게 용서는 흉악범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새벽미사에 나왔다. 주임 신부님 목소리는 참 졸리다. 새벽에 찬 공기를 가르고 급하게 주차하고 들어간 성당은 너무 따듯하다 못해 답답하다. 새벽미사 때 졸린 걸 모르고 이렇게 춥지 말라 틀어놓으시는구나. 따뜻함이 벅찬 건 종교도 그러해 보인다.


얼마 전부터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굴러다녔다. 이래저래 마음속을 구르며 나를 많이 힘들고 아프게 했다. 돌덩이가 생긴 이유는 마음을 터놓은 친구와 관계가 틀어진 것 때문이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최근 몇 년간 힘든 일이 있을 때 의지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고마움을 많이 쌓았었던 친구였다. 심지어 그 친구와 어울릴 수 있는 나를 스스로 좀 괜찮은 사람이라 느끼게끔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서로의 오해와, 정확히는 내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관계가 달라졌다. 친구는 내가 친구 아이 잘 되는 것을 질투한다고 느낀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아이들이 같은 교육 기관에 시험을 볼 일이 있었는데, 내 아이는 떨어지고 친구 아들은 붙은 것이다. 그날 나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그 마음을 질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 아이의 부족함이라 느껴져서, 시험 준비도 안 시키고 그냥 보면 된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함이 아이 부족함에 큰 몫을 한 것 같아서 많이 괴로웠다. 그런데 그런 괴로움을 겉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을 마흔 넘은 세월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기에는, 내 연기력이 턱없이 부족했는지 어색한 내 행동을 보며 친구는 질투라 느낀 것이다. 그럼 질투일지도 모른다.


난 항상 1등이 좋았다. 누군가를 이기는 것에 가치를 크게 두기에, 내 능력이 얼마나 되건 이기면 잘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기지 못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초라하고 부족했다. 나의 부족함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답답함을 물컹물컹 씹고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삼켰다. 그런데 그렇게 10년 넘게 삼키기만 하다 보니 마음에 병이 왔고 이제는 일등 꿈을 접어야 하는 인생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 욕망이 아이를 향한 것이다. 아이가 하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아이를 1등으로 뒷바라지하면 될 것 같았다.


아이는 시험에 떨어진 것이 속상하기는 하지만, 그 까지였다. 나는 해서 안될 것이 어딨냐, 제대로 안 해서 못된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그 마음이 꾹 눌러 닫은 병뚜껑 사이로 줄줄 흘러나와 친구에게도 전달이 된 것이다. 정말 난 질투였을까. 아니다. 나를 향한 자책이라 불쌍한 코스프레를 하지만 그 마음은 사실 당연히 누군가를 이겼어야 한다는 오만함이었다. 함께가 아닌 나만 잘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긴 다는 것은 남을 밟아야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내 아래로 들어가고, 난 그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었다. 그럼 이긴 나 말고 내 아래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답답한 히터 공기 속에서 신부님 말씀이 내 마음의 돌에 한 글자 메시지를 새겨냈다.


성경에서 나오는 용서는 피해자를 만든 범죄자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화합하는데 방해되는 질투와 시기,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가 화합하여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아. 내 경쟁 에너지는 세상의 올바른 에너지와 방향이 완전 반대였구나. 


화합을 깨는 에너지였고, 함께 잘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나만 더 잘되는 것을 원하여 결국 세상 화합을 방해하는 방향이었구나. 그렇다면 그 길은 참 복되지 못하겠구나. 앞으로도 지금까지 처럼 나 혼자 더 잘나야 직성이 풀린다면 축복받지 못한 인생을 살아갈 확률이 너무 높겠구나 싶었다. 뜨거운 물로 크고 날카로운 얼음 덩어리가 녹는 것처럼, 마음속 돌이 가벼워지짐을 느꼈다. 친구는 반대되는 방향의 내 마음에 불편하고 화가 났던 것이다.


1등은 내 인생의 영광과 상처였다. 1등을 향해 달렸었고, 그 덕에 누린 것들도 많았다. 특히 나 스스로 어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달리고 또 달렸다. 어찌 보면 똑같은 30대를 20년 치 살았을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달리니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할 수 없다고 느꼈다는 것을 몰랐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던, 나를 떠난 사람들은 복된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나 보다. 혼자 역행되는 에너지 뿜는 나를 피했던 것 보면. 


나는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왜 내 사주는 외로운 사주일까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친구도 많고, 오히려 만나자는 사람과 시간을 못 잡아 몇 번 미룰 정도로 주변에 사람이 가득한데 왜 어느 책에서나 외로운 인생이라 말하는지. 최근에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진심으로 내 곁에 마음 터놓은 사람들은 떠난다는 것을. 하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사주가 그런 사주인 것도 알겠고, 결과적으로 외로운 것도 알겠는데 왜 외로운 인생을 부여받은 것일까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6시에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세상의 올바른 방향과 역행되는 에너지를 뿜어대면 외롭겠구나. 그 곁에 아무도 머물지 않겠구나라고. 




사주는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스펙트럼이 넓어서 같은 빨강이라도 거의 흰색 같은 빨강과 검은색 같은 짙은 빨강처럼 그 안에서의 정도의 차이는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공부했다. 마치 혈액형 'A'형도 극단 A와 O형 같은 A형이 있는 것처럼. 나도 어쩔 수 없이 내 사주대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 자꾸 내 선택에 의해 펼쳐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사람 가득하지 못하지만 한 뼘 떨어진 곳에서라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내 외로운 사주에서 최선이지 않을까 싶다. 안 외로울 수는 없어도 극단의 외로움은 피해보려 한다. 


아이가 성당에서 복사를 한다고 하여 한 달 동안 새벽미사를 강제로 나갔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배웠다. 이제는 새벽에 눈뜨는 것이 낯설지도 괴롭지도 않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것과 괴로운 것은 다른 것이니. 사실 아이가 아니었으면 안 나갔을 새벽미사에 오늘도 가자고 하는 아이 때문에 또 나간 것이다. 새벽 6시가 기특하셨나 보다. 이리 큰 선물을 주신 것 보면.


함께 잘되려 할 때, 진정한 1등이라 믿기로 했다.





(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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