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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Nov 18. 2023

무제


   북쪽에는 십여 그루 미루나무가 높게 버텨 겨울 찬 바람을 막아 2월이면 봄볕을 모아준다. 남쪽은 화단 바깥쪽 울타리에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자란다. 뒤편 돌담에 봄이면 노랑꽃들이 수북하게 피어난다. 언제나 파란 하늘과 담 너머 동네를 배경 삼은 마당에 대추나무가 있다. 김장독과 대추나무는 방문을 열면 처음 마주치는 울안 풍경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집 뒷산에 백제 시대 때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무너진 성 있다. 서남향으로 터를 잡은 집의 왼편으로 30여 채의 집들이 있다. 동북쪽 저수지에서 넘친 물이 물길을 연 큰 개울은 서남쪽으로 흐른다. 장마가 시작되면 서남쪽으로 동네를 돌아 큰 다리를 건너야 한다. 앞으로는 개울 건너 시장통에 300여 채의 집들이 있는 시골이다. 농수로를 따라 걷다가 논두렁을 이리저리 돌아 큰 개울을 건넌다. 고샅을 몇 군데 지나야 시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에 갈 수 있다.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아버지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입학할 때 까지 이름 석 자와 100까지 세는 게 전부였다. 1학년 2학기 국어책에 추석이란 단원을 읽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아마도 이 문장을 읽지 못해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못했다.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읽는 흉내를 내려 애써야 했다. 선생님이 교무실로 가셨을 때 가방을 싸 줄행랑쳤지만, 뒤탈은 없었다. 

   3학년 여름방학 때 담임 선생님이 보내주신 엽서를 받았다. “얼굴도 동글동글 마음도 동글동글”이라고 나를 표현해 주셨다. 처음 받아 본 엽서다. 40년도 넘은 일이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활자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다. 

   5학년이 돼 학교 책을 읽을 수 있다기에 문예반에 가입했다. 수업이 끝나면 책을 읽다가 집에 가기도 했다. 이때부터 성적표 취미 란을 채운 건 언제나 독서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에 상관없이 그냥 취미는 독서가 돼버린 거다. 시골에서 커가니 별다른 취미가 있던 것도 아니니까. 

   6학년 어린이회장으로 불우아동 돕기 성금 모금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다. ‘불우아동 돕기’를 ‘불알 돕기’로 발음하여 모두가 웃었다. 그 웃음으로 알아차린 실수에 얼굴 빨개진 추억은 잊히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어린이 해동명장전’, ‘우리 겨레의 발자취’, ‘삼국유사’를 읽었다. 전국 자유 교양 대회(자료를 찾아보니 1968년 동아일보가 주최하여 첫 회를 실시하고, 1974년은 고전을 읽어 민족정기를 높이자는 것이 슬로건이었다.)에 출전 선수가 됐다.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공주 시내까지 나와 선생님이 사주신 짜장면을 먹고 대회에 참가했다. 


   교과서가 모든 책이었다. 주막거리 사는 친구들이 보는 표준 전과도 없었다. 숙제는 빼먹지 않고 해갔다. 시험공부라는 걸 해보지 않았다. 국민교육헌장은 외웠다. 성적표를 보여드리면 아버지는 말이 없어도 작은아버지들이 칭찬하셨다.      

   초등학교에서 받은 교과서는 죄다 흑백이었다. 나라에서 만들어 준거라 책값을 내지 않았다. 상급학교에 다닌 형의 지도책만 집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컬러 책이었다. 지도책은 책꽂이에 꽂아 둔 시간보다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서 나와 함께 있던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리 집은 지도에 나오지 않지만, 공주는 표시돼 여기쯤이 우리 집이거니 생각했다. 대전, 서울, 부산, 금강, 한강, 낙동강, 압록강, 평양, 백두산, 한라산을 지도에서 찾아봤다. 그 주변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살펴보는 건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궁금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컬러로 그려진 지도책을 보고 또 보기를 매일 계속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높은 산, 큰 강, 도시들, 바다 이름을 대부분 알게 됐다. 지도책 첫 장에 그려진 국기를 보고 그 나라 위치를 지도에서 찾기는 시시한 게임이었다. 자치기, 비석 치기보다 재미있고 혼자서도 놀 수 있는 놀이다. 누워서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그려보고 도로를 연결하며 반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지도책의 찾아보기에 있는 도시, 강, 산을 지도에서 찾는 일이 지도를 들여다보는 마지막 코스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이미 세계 여러 나라의 위치는 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진다. 지도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 수 있던 놀이터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매달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에 오일을 터구리로 장이라도 서면 장마당을 기웃거렸다. 풍장 치는 약장사가 소전 옆 공터에 터를 잡고 나팔을 불어댔다. 신기한 마술을 부리기라도 하면 넋을 잃고 구경했다. 약을 먹고 회충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겁이 났다. 저녁이면 아버지에게 나도 회충약 먹어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여름철에는 개울물이 많아져 먼 동네 멱 감기 좋은 방죽까지 걸어가 실컷 놀았다. 장터를 기웃거리거나 멱 감을 일이 없을 때는 친구들과 만화방에 들렀다. 친구가 집에 빌려다 둔 만화책이 있다면 다 보고서야 친구 집을 나섰다. ‘꺼벙이’(길창덕)와 ‘독고탁의 비밀’(이상무)이 기억나는 만화다. 만화 꺼벙이는 친구의 별명이 되고, 빡빡 깎은 독고탁의 머리는 우리들의 머리 모양과 같았다. 아버지가 ‘어깨동무’라는 잡지를 사 왔던 기억이 있다. <십시일반>, <부자의 그림일기>, <광수생각>은 성인이 돼 사 본 몇 안 되는 만화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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