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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Sep 21. 2023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

한 권의 책에서 특정한 내용을 뽑아 쓴 주제 서평 11

   딸을 둔 아빠다. 언젠가 나를 떠나 살게 될 딸을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과거보다 현재가 여성에게 나은 세상이듯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면서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잘 극복해 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키우고 싶은 마음만큼 해 줄 수 있는 게 없음도 안타깝다. 밤길이 무섭다는 여자의 말을 나는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유튜브에는 선진 외국에 비할 때 밤길이 안전하다는 국뽕이 넘친다.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를 통해 딸 둔 아빠 마음에 딸을 이해하고 아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조직인 교직에서 오래 살았다. 직장에서 꼰대라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있다고 말한다.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를 읽으며, 소설가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기자 유인경의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와 비교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 2장을 읽어가는 내내 50대 남자 독자로서 아주 불편했다. 문장이 길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다. 잠시 쉬었다 읽어야 했다. 하루를 묵혔다가 이어 읽었다. 남자로서 방어기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험은 1990년대 상황이다.’, ‘2018년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다르다.’, ‘여러 전제에 동의할 수 없다’, ‘논지 전개가 현실보다는 소설의 등장인물과 영화, 드라마의 등장인물을 통해 뽑아낸 것이 다수다.’라는 동의할 수 없는 전제조건을 가슴에 담고 읽는다. 

독자가 양성평등을 어느 직장보다 존중하는 교직에서 근무했었기에 기업의 직장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답답함이 덜어지더라. 한편으로는 작가가 그렇게 상처 입었음에 안타까움도 생긴다. 세상은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당연히 보아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하며 이어 읽는다.      


   “남자는 능력을 발휘할 때 남성으로서의 매력도 함께 커지지만, 여자는 그럴 때 오히려 ‘여성적’ 매력이 떨어진다는데”라는 문장에 공감할 수 없다. 주변에 일 잘하며 매력이 떨어지지 않은 여자들도 봐왔다. 여자가 일을 못 한다고 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과 매력은 내겐 다른 범주였다. 

“비정규직일수록 옷차림이 화려하고 화장도 더 짙었다고 한다.”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얕보는 듯한 태도가 보인다. 남자가 둔감해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 동의하기 어렵다. 

   “남자들은 왜 자신들의 사소한 공적을 그렇게 부풀리면서도 몇 배 더한 노력으로 이룬 여자들의 성과를 인정하는 일에는 그토록 야박하고 옹색하게 구는 것일까?” 이 문장도 신규교사나 60대 교사나 서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역할이 정해져 있는 교직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다. 작가 인식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교직 사회가 그만큼 성 평등이 존중된다는 의미다.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튀지 않으려는 양가감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는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도 조직에서 자기 위치를 잃지 않고 세평을 의식해서 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선생이라도 해야 했다는 후회를 평생 하셨다고 한다”라는 인식은 흔히 했던 말이라 할지라도 ‘이라도’라는 표현으로 교직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임용고사 경쟁률을 생각한다면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 학교나 ‘미친개’로 불리는 교사들이 있었다.”라는 문장은 지나친 일반화다. 없었다고 반박하지 않는 선에서 말을 멈춘다.

   “많은 여성이 애정 관계에서 강렬한 열정을 원하듯이, 많은 남성은 사회생활에서 무모한 충성심을 보여야 진심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라는 문장은 20~30년 전 직장 생활에서 뽑은 작가의 추측이리라. 이제는 조폭도 이러지 않는다. 다분히 利害를 따지는 직장 분위기도 있다.      


   루소가 <에밀>에서 보여준 여자에 대한 인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비하, 쇼펜하우어의 막말, 프로이트의 인식은 현재의 시점에서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 남자보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 수준 이하였다.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 역사를 볼 때 현재 한국사회의 여성성이 폭발적으로 향상되었다는 점을 여성들이 이해하면 남자들이 겪는 불편함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뒤로 가 얼굴 크기를 작게 보이려고 하는 여자들은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행히 작가가 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의 특징과 리더십 세 가지는 남자로서 눈여겨보지 못했던 부분이다. ‘조직에서 여성은 지나치게 관계에 신경 쓴다’, ‘조직 내 네트워킹에서 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직장에 대한 절박성과 자기 비전에 대한 확고한 방향성이 약하다’로 정리하며, ‘엉뚱한 상상’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남자와 여자가 공감 능력이 다르다는 무한루프의 딜레마는 자주 아내와 겪는 상황이라 공감한다. “가슴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가슴에만 관심이 있다는 별에서 온 종족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것이 비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라는 표현은 재미있다. 공감을 논하며 가까운 사람에게 더 쉽게 이입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집착이고 애착이 된다며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불교 철학을 생각하게 한다. 서양 사회가 공감을 학습으로 배우게 한다는데, 역지사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감을 동양 사회에서는 개인에게 맡겨왔다고 본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진짜 강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자기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이다.”란 인식에 공감한다. 지난 정부의 보건정책 국책연구기관이 발표했다는 대책을 읽으며 놀랠 노자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이다. 이렇게까지 한심할 수 있는가. 가장 답답한 문장이다. 

   출산 파업 선포라는 단어를 보며 러시아에서 있었다는 ‘여성들의 잠자리 거부 운동’의 본래 표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검색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 “권력의 (도취) 경험은 누군가 두개골을 열고 감정이입을 하는 뇌 영역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은” 문장에서 화가 나면 IQ가 반으로 떨어진다는 상담 전문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평정심의 유지는 보통사람이나 권력자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세네카의 인생론과 같은 스토아 철학이 험난한 시대에 주목받는 것이다.

   ‘남자도 기대고 싶다’라는 부분은 책을 읽으며 스트레스받을 남자에 대한 배려는 아닐 것이다. 때론 남자도 기대고 싶지만, 남자에게 기대하는 역할, 의무감, 책임감을 생각하며 남자들은 쉽게 기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다.      


   서평이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를 비판하는 논조를 감추지 못한 것은 독자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다.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편을 가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아쉽다. 양성에 관한 보통 시각을 가진 남자라면 <남자를 위하여>를 읽어 여성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받고, 딸을 가진 아빠로서는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 현재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를 읽어 양성평등의 문화가 현재보다 미래에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마초적인 남자라면 다소 불편할 수 있음도 고려하면서.    

 


   

사족이다. 한국사회에서 주로 책을 사보는 사람들은 20~30대 여성이다. 네이버 빅데이터에 따르면, 이 책의 주 독자층이 20대 여성이란다. 저자와 독자의 궁합이 잘 어울린다는 거다. 2018년 페니미즘이 흐르는 강물에 띄운 배를 본 듯하다. 초판이 나오고 한 달 만에 3쇄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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