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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Sep 24. 2023

글 읽기와 삶 읽기

한 권의 책에서 특정한 내용을 뽑아 쓴 주제 서평 12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는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사용자 수를 늘렸다. 중국어, 힌디어는 자체 인구수 덕분에 주요어라는 지위를 가진다. 아랍어는 종교 전파에 따라 건조기후 지역으로 확산하였다. 한국어가 세계의 주요 언어가 아닌 탓에 주요 언어로 남겨졌거나 생산하는 저작물을 번역해서 이해해야 하는 숙명이다.

   <유라시아 견문>의 저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키릴 문자와 아랍어로 쓴 글도 챙겨봐야 한다는 인식에 공감한다. 번역이란 과정을 거쳐야 하고 오리엔탈리즘에 젖는 주장을 벗겨내고 풀어내는 과정도 필수 코스여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30여 년 전 강의를 옮긴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는 선택지를 준다.     


   타임머신이 내려놓은 강의실에 앉아 있다.

남의 학교 강의실에서 청강하는 중이라 아는 사람 없이 수업에 집중한다.

실루엣만으로는 교수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어도 메시지는 잡음 없이 들린다.

때는 이 땅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들여오던 90년대 초다.     


   강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삶에서 식민지성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식민지성이란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을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한 사회”식민지적이라 한다. 풀어보면 삶과 지식이 겉도는 현상을 더 만들지 말자는 목적에 동참하라 한다. 이론에 치우쳐 그 속에 담긴 자신의 삶에 대한 암시를 외면하기, 자신의 삶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글 읽기에 일생을 기꺼이 바치기, 책 읽기를 너무나 지겨워하는 것 등은 식민지성을 재생산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때때로 유학파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 외국은 이걸, 이렇게 한다. 우리는 이걸 못하니 따라 해야 한다는 방식의 ‘전달’에 그치는 경우가 있다. 간혹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무지개를 좇으라 한다. 이런 사례는 조혜정 교수 친구의 말을 빌리면 오퍼상 역할이다. 오래전에 「오리엔탈리즘」을 읽으며, 번역자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던 것은 그가 오퍼상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의 글로 받아들인다.     


   강좌는 〈문화이론〉이다. 문화이론이 말하는 이론과 개념은 서양 학자들이 그들의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기 쉽지 않다. 적확한 예로 든 것을 옮겨본다. “문화상대주의라는 개념은 긴 역사 속에서 이방 문화와 접촉하고 문화 간의 교류가 실제적 효과를 거두어온 서양 역사 – 제국주의 팽창 – 속에서 나온 개념이다. (중략) 이 개념을 부모와 자식 세대 간 문화적 단절을 극복하려는 방법론적 태도로 상대주의의 개념을 부각해 학생들이 감을 잡게 한다”


   주입식 교육 시스템에서, 받아 암기하는 수준은 ‘명제적 지식에 중독됨’으로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를 가진 사회에 팽배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미 세상은 “일상적 삶이 식민화되어 간다는 위기감, 중심과 주변, 타자화된 주체와 권위적 설명의 해체 등이 이 시대의 문제를 풀어가는 주요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다.”라고 본다. 이 문장은 강의하는 교수가 배우던 시기에 풍미하던 네오마르크시즘이라는 학풍에 따라 연구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인식이리라.      


   “당신은 누구인가? 등으로 나에게 질문하지 말아 주십시오.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으라는 식으로 질문하지 말아 달란 말입니다”라는 미셸 푸코의 부탁으로 시작해 저자란 무엇인가 질문한다. 저자가 계몽주의적이지 않고 명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독자는 책을 읽을 때 국정교과서나 성경을 읽듯이 수동적으로 읽지 말고, 저자와 대화하듯 적극적인 행위로써 책을 읽자 한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텍스트란 사회화의 과정, 저자와 독자가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강조”해왔음을 소개한다. 그러하기에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좋은 책이다.      


   글쓰기는 시대 변화에 따라 다시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례 이링 페쳐의 《누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웠는가?》를 들어 “텍스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적극적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명제를 풀어간다. 주체적 책 읽기는 시대의 특권이 아니라 짐이자 의무라는 소결론을 내리며.     


   문화 읽기의 어려움을 토론을 통해 느끼게 한다. 마르크스와 푸코는 인간 해방에 관심을 두었고, 미셸 푸코는 난해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열어두었다. 길든 사고 경향 탓으로 돌리며 ‘경전 읽기’ 방식을 고수하지 말고, 성서에 적힌 것이라면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자근본주의적 습관을 깨야 한다고 강조한다.

   번역서를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을 멋지게 표현했기에 옮긴다 “ 누구의 글은 소화 불량기가 남아 있는 번역 투가 아닌 우리말로 매끄럽게 쓰여 있어 잘 읽힌다.”          




   30년 전에 이 강좌를 수강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은 현실에 돌아와 든 생각이다. 수강하며 메모한 것을 정리하니 글이 체계적이지 않지만, 결론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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