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by 노충덕

중용 인간의 맛

2026. 3. 3(화)


‘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가는 법’에 대한 답을 찾으려 『중용(中庸)』을 읽는다. 깊게 한 공부나 연구가 아니다. 선조들은 십대에 읽어 통달했고, 도올은 21세에 중용을 읽으며 울었고,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동년배들이 퇴직하는 시기라 너무 늦게 읽는다. 공자께서 ‘나는 중용을 택하여 지키려고 노력해도 불과 만 1 개월을 지켜내지 못하는구나!’라고 자탄한 일에 비추어 나를 다독였다.


『중용』은 “군자의 도는 부부간의 평범한 삶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에 꽉 들어차 빛나는 것이다.” 보통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가히 더불어 군자의 도道를 알 수 있지만, 도의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한 현실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감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남이 능히 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라. 호학역행(好學力行)의 도에 능하게만 되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현명해지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건하게 될 것이다. 밤새 소리 없이 소록소록 쌓이는 백설처럼 인간의 내면에 쌓이는 신독의 덕성이야말로 『중용』의 궁극적 주제다. 도올은 공자의 가르침이 단순한 윤리적 교훈에 그치지 않고 우주적 진리를 구현한 체계로서 유교화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노력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독자가 소화한 중용의 가르침이다.


깊숙하게 『중용』의 내부로 들어가 소화하려 애쓴 걸 모아 본다. 도올 선생의 주장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신선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관점을 찾아주니 호기심을 채울 수 있고도 재미있는 거다.


서(序)에서 도올은 역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중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간존재도 해방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여기서 서구의 사상으로서 이성과 베이컨의 경험주의가 낳은 폐해가 인류에게 위협(핵과 산업화, 기후 변화 등)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공감할 수 있다. 기탄(忌憚)은 ‘거리낌’이고 ‘기탄이 없다’는 것은 ‘공적 마인드’가 없다는 것이란 문장에서 공론의 장에서 벌어지는 언어사용의 미숙함을 깨우친다.

베네수엘라를 침략하고 엊그제 이란을 공격하는 미국 트럼프는 칸트가 말한 정언 명령 (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타인에게 있어서나 인간성을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써만 취급하지 않고 항상 목적으로서 취급하도록 행위하라)을 어기고 있다. 도올은 중국 문명에게 서구 문명이 지향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창출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결국 미국은 한국을 버린다는 사실이다.”(p.34)라고 말한다.

도올은 『중용』을 읽으면서 ‘일상적 삶의 혁명’을 바라며 정자程子가 말한 논어 독서법을 서술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 사람, 이 책을 읽은 후에도 그 사람이면, 그 사람은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중용(中庸)

『중용』에서 1장인 천명장(天命章)이 가장 어렵다. 『중용』을 읽고 “중용”만을 말하며 “성誠”을 말하지 않은 자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라니 더 그렇다. 誠은 자연 nature에 가까운 데 nature는 서구식 개념이라서 誠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서양 철학이 중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목적론적이며, 행복조차도 성공적 삶이라 말한다. 중용을 ‘無過不及’으로 말하는 주희는, 근대정신의 한 표현이기는 하나 틀렸다고 본다. 중용은 일차적으로 품성의 탁월함과 관련된 것이지만, 중용의 지향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고귀한 특징인 이성 혹은 사유의 힘의 발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나아가 중용적 인간은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성誠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도 잘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잘한다는 것으로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이 그렇다, 인간을 교육시킨다고 하는 문제는 이성적 인간을 만드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상식이다. 우리가 배양해야 할 것은 정감情感의 윤리성과 심미성이다. 교육학자 아이즈너가 예술 수업에서 강조하는 예술적 감식안보다 큰 범주다. 이성의 교육을 통섭하는 새로운 인성의 교육이 중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이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이다.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한 것은 결코 언어적 개념 조작에 의한 어떤 논리적 결구도 근원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는 개인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회적 가치와 더불어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인문주의적 상식이라고 본다. 21세기 민주제도의 성패는 리더십의 도덕적 질 확보에 달려있다. 지知라는 것은 인식론적 탐구라기보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천적 앎이다. 앎의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덕성은 “호문好問”이다. 지나가는 어린이에게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물어라! 는 연암 박지원의 말이다. 어떤 질문 즉 테제가 제시되면 그것에 관련된 모든 양극적, 대척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하나의 작은 선이라도 진심으로 고뇌하면서 가슴에 품어 잃지 않는다면 공자-자사가 말하는 중용이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시중時中을 발현하고 농구能久하라.


용기도 반드시 화和를 전제로 해야만 진정한 용기가 된다. 중용이 계속 밀고 가는 “성聖”의 테마는 모두 신독愼獨과 관련이 있다, 남이 알아주는 것과 무관하게 나의 내면적 도덕성을 홀로 지키는 것, 그것이 성인의 길에서 가장 난제로 본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을 은둔하여도, 부끄럽 없이 내 갈 길을 가는 것이 중용의 길이라고 공자-자사는 선포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하기 위하여 갖는 모든 인간관계를 유가사상가들은 다섯 관계로 통칭했으니 오륜이다.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붕우관계다. 부부관계는 부자관계, 형제 관계에 선행하는 가장 본질적인 관계다. 부부는 오륜의 하나일 뿐 아니라 우주적 생명력의 핵심이다.

우주의 법칙은 우주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우주 밖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창조론이란 것은 ‘법칙부여’의 외재주의이다. 베르그송은 외재주의를 거부한다. 충서忠恕에서 忠은 가슴 깊은 곳에서 충실하여 우러나오는 느낌, 서恕는 나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에 이입하여 같이 느끼는 공감상태를 의미한다. 논어에는 恕가 ‘기소불욕 물시어인’으로 되어 있다. 중용에는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이라 고 명료하게 나타냈다. 공자-자사는 ‘언행일치’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단지 언은 행을 돌보고, 행은 언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행원필자이 등고필자비(行遠必自邇 登高必自卑)란 먼 길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서구 언어에는 효孝라는 말이 없다. 효는 특정한 나의 부모에 대한 복종이나 추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인간의 선업을 계승하는 문화적 마인드야말로 진정한 효라고 천명하고 있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제사이다’는 허버트 스펜서(1820~1903)의 명제다. 종교의 존속은 사회적 연속성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장례는 죽은 자의 위位로써 하고 제사는 제사를 받드는 자손의 위位로써 한다는 주공周公이 확립한 예이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기회를 얻지 못한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으려면, 먼저 친구들에게 신임을 받아라. 친구들에게 신임을 받으려면, 먼저 부모님께 효순해야 한다. 자기 몸을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님께도 당연히 효순할 수 없다. 자기 몸을 성실하게 하려면 선善을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유교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건다. 이 사람 중심의 생각이 유교의 한계일 수도 있으나 유교의 영원한 생명력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뽐낸다. 그러나 조랑말이라도 열심히 가기만 하면 열흘이면 같은 목적지에 너끈히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가는 목적지가 명확히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강대국은 약소국에 대하여 “후왕이박래厚往而薄來”해야 해서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후하게 준다는 원칙을 가졌다고 도올은 말한다. 이는 공자-자사의 위대한 영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의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와 이란 침공한 것은 후왕이박래와 거리가 멀다.


인仁은 끊임없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하면 천天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박학과 심문이 합쳐서 학문이, 신사와 명변이 합쳐져서 사변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학문과 사변은 知의 세계이고 독행은 行의 세계이다. 지행합일의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가 결국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든다.

성誠에 기반하여 명明으로 나아가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明명을 기반으로 성誠으로 나아가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성性이란 자연에서 문명으로 가는 과정과 관련되고, 교敎라는 것은 문명에서 자연으로 가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라 한다, 문명에 속해 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하여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사상이 닮아있다. 자사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성실하다는 말로 표현한다. 자사에게 자연의 법칙은 그 자체가 종교적 경건성의 대상이며 인륜도덕의 법칙이며 심미적 찬탄의 대상이며 인간문명의 모든 가치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 이런 사상은 서양인들에게는 있어본 적이 없다고 도올 선생은 말한다.


중국인들은 주나라 이후부터 이미 인간의 도덕을 하나님이나 초월적 픽션으로 보장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간의 도덕은 오직 인간의 주체적 행위의 문제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생각은 실존주의의 기발한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너무도 당연한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인간은 고전을 공부할 자격이 없다. 현대사는 나의 기점이다.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현대사는 일제침략사에 대한 반성이다. 이 반성이 없는 자들은 한국인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도올 선생의 생각으로 공감한다.

변화란 개념을 다이어트로 설명한다. 80킬로에서 10킬로를 빼는 일은 쉬운 일이라 이 정도의 수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변變의 단계이다. 1년이나 2년의 시간에 만약 건강하게 50킬로로 내려왔다면 단순히 몸무게를 뺀 사람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생활습관과 성격, 인격구조의 화化를 체험한 사람일 것이다.

‘성자자성誠者自成’이라는 말은 우주의 모든 성실한 법칙이 외재적인 존재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노자사상은 도덕부정의 사상이나 그의 책 제목은 『도덕경』이다. 도와 덕은 현대 서양어의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도는 인식의 문제이지만, 덕은 ‘몸의 축적’에 관한 것이다. 모든 덕은 나의 몸에 습관으로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덕을 통하여 나의 내면적 도덕적 주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순간’은 눈을 한번 깜박거리는 시간이고, ‘찰나’란 손가락을 한번 튀기는 시간을 65분 한 것이다.

-犬不七年, 鷄不三年. 도올 선생의 글에 나오는 닭의 이름이 봉혜다. ㅎㅎ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하였다고 하였으나, 도올은 술述을 통하여 작作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늦게나마 四書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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