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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03. 2023

브리지 오브 이슬람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두 번째(9,300자)


이슬람은 중세 유럽을 깨웠다

   <개척하는 지성>은 뉴노멀에 준비하자 선언한다. 준비를 위해서 포기할 줄 알기, 열린 마음의 포용성, 도전하는 자세를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 자신만의 개척하는 지성의 능력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기득권으로 평생 보장을 받으려는 생각을 빠르게 포기해야 뉴노멀에 적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세는 개인이나 21세기 한국에 꼭 필요하다. 뉴노멀에 적응하기 위한 조건인 ‘포기’를 예로 들어본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함포사격을 중요한 승리요인으로 판단했고 함포를 확장했으나 미국이 가진 레이더를 알지 못했기에 패전했다. 이에 견주어 몽골 제국과 아랍 세계는 개방적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개방성은 저력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성공을 위해 도전한다. 역사상 제국은 타민족에게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에 달렸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 아랍 세계의 개방적 이슬람은 중세 유럽을 깨웠다. 중세 유럽은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이른바 ‘암흑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이베리아반도의 유럽인, 특히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스페인이 이슬람의 재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제로 이슬람의 과학이 발달하여 일정 수준에 올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슬람은 어떻게 과학을 발달시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몇 가지를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이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학문 특히 과학이 어느 수준에 있었는가? 유럽에서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를 수용한 주체는 누구이며 무엇을 어떻게 수용했는가? 나아가 오늘날 이슬람은 어떠하며 긍정적으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본다

   제기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이슬람 세계에 관한 지식의 오류 하나를 바로잡아 본다. 히잡은 머리카락과 목을 가리는 헤어 스카프이고, 니캅은 눈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복장이다. 히잡이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란, 터키,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에서 히잡 착용은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국가가 국책으로 히잡을 벗겨낸 것이다.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열혈 여성부터 히잡을 다시 쓰기 시작했으니 억압은커녕 저항의 상징이었다. 히잡 패션은 2000년 이후 급성장한 신종산업이다. 히잡 착용에 관한 이슬람 여성의 항변은 일리가 있다. 


“답답한 것은 너 같은 엉큼한 수컷일 뿐이다. 흘낏거리는 남성의 끈적끈적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행, 소비주의에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샴푸, 린스, 컨디셔너를 매일 쓰지 않아도 되고, 염색과 드라이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니캅이 선사하는 해방감은 “타인의 시선, 평판에서 완벽하게 차단된다”라는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 Ⅱ>가 전하는 현실이다. 알-자지라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면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를 파악할 수 있겠다. 이슬람에 관한 여러 가지 무지와 오해는 인류 문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근원을 따져보면 서구 문명 중심주의가 오해하도록 만든 것이다. 학교 교육을 통해 이슬람을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검’이라는 폭력 종교로 기술하고, 근대의 이슬람 부흥 운동을 이슬람 근본주의’라며 호전 종교로 몰아붙이는 것은 서구에서 만든 관점이다. 알코올이란 단어가 아랍어에서 시작돼 현재까지 사용한다는 수준의 아랍에 대한 이해는 서구 중심의 교육을 받은 우리에게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 발달 배경

   이슬람 세계의 학문이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이슬람 세계의 황금기를 연 사람들은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전반까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를 건설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이었다. 그들은 과학과 학문을 장려하고 각지의 학자와 사상가들을 불러 모아 후원했으며, 고대 그리스, 힌두, 페르시아의 학문전통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였고 고전번역에 힘썼다. 

   <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에 따르면, 아랍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알 만수르, 알 마흐디, 알 마민 치세에 아랍인들이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 아람어, 시리아어 등으로 기록된 서적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했다. 번역 운동이 활발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첫째, 이슬람교가 코란과 순나에 대한 최종 판단은 칼리프에게 있다는 종교적 담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리스 철학 서적을 번역하였다. 둘째, 알 만수르가 꾸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꿈에 대한 일화에서 볼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경도 번역 운동의 방향성을 갖게 하였다. 셋째, 당시 유럽 세계와 아랍 세계의 수준 차이가 작지 않았다. 12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자연철학을 엿볼 기회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세 크리스트교들에는 오직 신만이 일상생활의 유일한 결정 요인이기에 사물의 본질을 탐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과학이 존재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유럽에서 양피지에 글을 쓸 때, 다마스쿠스 서적 시장은 책 말고도 잉크, 갈대 펜, 고급 종이에 이르기까지 문예 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을 팔았다. 9세기경 15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랍인들은 과학과 철학을 다룬 그리스 책이라면 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구해 번역했다. 아랍어는 그리스어를 밀어내고 보편적인 과학 언어가 되었고, 이슬람 도시에는 대부분 어떤 형태로든 대학교가 있었다. 런던에 공공 조명 시설이 출현하기 7백 년 전 가로등과 시내 포장도로, 풍족한 공공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코르도바의 외과 의사들은 이슬람교 사원에서 생선 뼈를 갈아 만든 도구를 이용해서 백내장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한다. 10세기의 코르도바를 여행하고 싶다. 10세기 경이되면 번역 운동이 끝나게 되는데 이때가 되면 과학적, 철학적 연구가 바그다드와 다른 곳의 수요 대부분을 채우고 자립하는 수준에 이르기 때문이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영국, 프랑스, 독일의 책을 번역한 것은 아마도 이 시기 아랍 학자들의 그리스 고전번역 작업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이 성공적인 번역 운동과 함께 진행되었음과 영정조 시대에 규장각을 중심으로 성했던 학문활동을 떠올린다. 단일한 사건이나 현상이 세상을 변하게 하기도 하지만 역시 세상의 변화는 개방성이라는 전반적인 분위기의 변화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 수준

   이슬람의 학문 특히 과학이 어느 수준에 있었는가? 

   <유라시아 견문>의 저자는 문학에 <천일야화>, 역사에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 철학은 <코란>을 아랍어 문·사·철로 소개한다. <역사서설> 은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지성, 이븐 할둔의 역사서다. <역사서설>은 서론과 3부로 구성했는데 서론에서는 역사학의 장점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역사가들이 범하는 실수를 예를 들어준다. 1부는 문명과 그 근본적 특징(왕권, 정부, 직업, 생계, 기술, 학문) 및 이를 가능케 하는 원인과 이유를 논한다. 2부는 천지창조에서 14세기까지의 아랍인들의 역사와 종족과 왕조들을 다룬다. 시리아인, 페르시아인, 이스라엘인, 콥트인, 그리스인, 비잔틴인, 투르크 인등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민족을 포함한다. 3부는 베르베르족의 기원과 마그리브 왕가와 왕조를 다룬다. 김호동 교수가 옮긴 번역서 <역사서설>은 이븐 할둔이 말하는 서론과 제1부를 옮긴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분량 면에서 이븐 할둔의 역사서 전체의 약 1/7에 해당한다니(번역서의 본문이 542쪽 분량이다) 전체의 분량은 어마어마한 것이리라. 600년 전에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30년 전에 우리도 인터넷이 세상을 이렇게도 바꿀 줄을 알았겠는가. 

   ‘연대의식’은 이븐 할둔의 문명론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연대의식은 정주 생활을 하는 도시민이 아니라 황야와 초원에서 사는 유목민들이 소유한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연대의식을 통해서 정복을 완성하고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며, 이 도시와 국가를 토대로 문명이 탄생, 발전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졌던 그들이 도시 생활과 사치에 물들게 되면서 그것을 점차 상실하고, 결국 더 강력한 연대의식을 지닌 다른 집단이 건설한 국가에 의해서 붕괴하고 만다. 이처럼 이븐 할둔은 연대의식의 성장과 쇠퇴로 국가와 문명의 흥쇠를 설명한다. 19세기 20세기 초 국가 유기체론도 이븐 할둔의 사상 속에 씨앗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983년에 카이로에 개교한 아즈하르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서 현재까지 전통 이슬람 문명의 계승과 향상에 명실상부한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혜택이 무엇인가 물으면 으레 의술이라 대답한다. ‘지혜의 집’은 9세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아시아, 북아프리카에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아바스왕조의 칼리프들이 세운 도서관이다. 아랍은 <싯단타>라는 인도 책에서 천구, 별, 사인함수 등 힌두 지식을 받아들였고, 아랍은 사인과 코사인, 탄젠트와 코탄젠트, 시컨트와 코시컨트를 발견했다.

   책 <지혜의 집>은 서양인들이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직접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불편한 진실을 걷어 내고 진실을 밝힌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 이후 이탈리아로 흘러 들어간 학자들의 영향이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주된 요인 중 하나로 배웠으나 진실이라 말하기 어렵다.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세 유럽은 아랍의 과학기술에서 실용성을, 아랍 학문에서 과학 정신을, 아랍 철학에서 르네상스의 씨앗인 이성을 찾았다. 아랍의 과학과 철학은 크리스트교 세계를 무지에서 구하고,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를 가능하게 했다.

   <생각의 역사>에 의하면 8세기에 약국의 개념이 탄생한 곳이 아랍이고, 바그다드에서는 약사 시험에 합격해야만 약을 짓고 처방할 수 있었다. 공중보건의 관념도 아랍인에게서 나왔고, 의사들은 환자를 방문해 주변에 전염이 될만한 질병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의사 알라지는 천연두와 홍역을 처음으로 설명했다. 이슬람 의사 이븐 시나가 쓴 <의학 정전>은 아라비아와 그리스의 의학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12세기 라틴어로 번역되어 적어도 17세기까지 500년 이상 유럽의 의학교에서 기본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9세기 후반 바그다드에는 서점 100여 군데가 같은 거리에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이 마호메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은 알가잘리다. 알가잘리는 <종교학의 부활>을 통해 이슬람교의 기둥, 일상생활, 열정과 욕망, 신에게 가는 길을 이야기한다. 알가잘리 이후에는 수니파 이슬람교(코란과 마호메트의 일상 행동이 충분히 안내가 된다는 믿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을 수용한 주체

   유럽에서 이슬람의 과학과 학문을 수용한 주체는 누구이며 무엇을 어떻게 수용했는가? 

   유럽에서 누군가는 아랍의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했으리라. 당시 크리스트교(로마 가톨릭)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이슬람 세계의 학문을 가져온다는 것은 일본이 정부의 적극 지원 아래 서양 과학기술과 학문을 수용한 것과는 다르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파리대학교에서 아랍 학문을 논하는 것이 금지되고, 교수가 쫓겨나거나 암살당했던 사실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그래도 용감했던 크리스트교도들이 있었다. 

   영국인 애덜라드는 지중해 동부 옛 시리아 도시인 안티오크와 같은 아랍지역으로 학문을 배우러 먼 길을 나섰다. 아랍에서 이미 300년 전에 아랍어로 번역된 유클리드의 <원론 : 기하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 천문학 교과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아스트롤라베라는 천체관측기구 사용법을 서양에 소개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지배자 루지에로 2세는 아랍학자들을 시칠리아로 불러들여 70여 권에 달하는 아랍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무식했던 유럽에 던져주었다. 루지에로 2세의 손자 프레데릭 2세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아랍 학문을 인정하고 후원했다. 그 후원 속에 영국인 마이클 스콧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아랍 사상가 아비센나와 아베로에스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하여 유럽을 꿈에서 깨도록 했다. 이븐 루슈드는 12세기 스페인의 아랍계 이슬람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에 대한 대부분의 해설서를 쓴 최고의 주석가로 13세기 이후 라틴 세계에 학문적으로 아베로에스파를 탄생시킨다. 아베로에스(아베로스)는 이븐 루슈드의 라틴어 이름이다.

   서양 사상에 미친 영향의 측면에서 아베로에스가 중요하다. 그의 사상과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코란과 조화시키려 했고, 이성과 계시의 역할을 조화시키려 했으며, 다양한 인구 계층들을 지성과 교육에 따라 구분하려 했다. 코란의 말씀을 전부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코란의 문구가 철학의 합리적 진리에 어긋나면 그것은 은유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1470년대에 베네치아에서 아베로에스의 책이 50여 종이나 출판되었으며, 아베로에스주의는 유럽의 손꼽히는 대학들에서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었다. 13세기말에 이르면 아라비아 과학과 철학은 대부분 유럽에 전해졌다 아라비아의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은 서양 학문의 초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바그다드에서 스페인의 톨레도에 이르는 거대한 우회로는 지금 우리가 지닌 기본적 사고의 틀을 형성한 셈이다. 

   아랍인이 아라비아어로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비잔틴 지역에서 아랍의 수준 높은 발전에서 자극을 받아,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서적을 가져다가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를 비잔틴 인문주의라 부르며, 후일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풍성하게 하는 원인 되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마키아벨리가 이슬람 서적인 <역사서설>을 읽고 사회과학에 눈을 떴고, <데카메론>과 <신곡>도 안달루시아의 만화작가 이븐 알-아라비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며, <로빈슨 크루소>의 원작이 <신드바드의 모험>이라 한다. <돈키호테>조차도 아랍 역사가가 쓴 책이 원작이다. 이는 이베리아에서 이슬람이 쫓겨난 후 크리스트교도들이 1499년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 광장에서 200만 권으로 추산되는 아랍어로 된 책을 태운 이후 필사본을 들고 탈출한 이슬람들이 있었기에 드러났다고 한다.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 모습

   오늘날 이슬람의 모습은 어떠한가?

   중세 유럽을 깨웠다는 이슬람 세계는 근현대를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가?

   19세기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간 수차례 전쟁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 간 충돌이다. 1920년 오스만제국의 그리스 정교도 130만 명은 그리스 영토로, 그리스에 살던 이슬람 60만은 터키로 이주했다.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것은 미국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슬람의 각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은 1991년부터 이후부터 태어난 신입생에게 <코란>과 <논어>를 읽으라고 가르친다. 러시아인 가운데 2,000만이 이슬람이다. 모스크바에는 200만 이슬람이 살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이 거주하는 도시는 모스크바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는 서남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라는 칼리프 시대 지배 지역을 넘어섰다.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의 동부 연안과 사헬 지대까지 넓어졌다. 유럽에서도 이슬람 인구는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 중 인도네시아는 세계 4대 인구 대국이자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로 아세안의 대표국이며 반둥의 비동맹주의라는 시대정신을 담지한 소프트파워 강국이다. 인도네시아는 만달라 국가(동남아 특유의 국가 성격으로 영토성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형국가가 아니고, 왕조 개념도 없다. 명료한 국경 없이 느슨하게 연계되는 지역)만이 존재하다가 20세기 중반에야 국가로 성립했다. 이제는 동남아시아에서 미국, 중국, 일본, 인도의 균형자 역할을 하려 한다. 이슬람 회의기구를 토대로 이슬람 부흥에도 역점을 두며, “미래는 적도에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전환 시대를 연 부토는 중국 없이는 아시아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개진한다. 1974년 라호르 범이슬람 회의에서 크리스트교, 유대교, 힌두교 문명 모두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슬람 문명만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슬람 사회주의를 추진했다. 21세기 들어 파키스탄은 이란과 중국, 이슬람 세계와 중화 제국을 연결하는 관문 국가가 되어 가는 데 지구본에서 위치를 확인해 보면 정말 그렇다.

   말레이시아는 1997년 IMF 사태에 맞서 고정환율제와 자본 통제(IMF의 처방과 정반대로 응수)라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인 ‘이슬람 경제’로 발전 중이다. 은행 이자는 간통보다 36배 나쁘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이슬람 금융은 위험성을 공유하는 강점이 있다. 할랄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허용된 것, 하람은 이슬람 율법이 금지하는 것을 뜻한다. 1994년 말레이시아 정부가 할랄 인증제를 도입한 이후 소비의 할랄화, 할랄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까지 진출한 할랄 산업은 윤리적 소비라는 최신 흐름과 맞으며, 이슬람의 인구 비중과 종교적 열정을 생각하면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터키의 대통령 에르도안은 집권 이래 10년 넘게 재 이슬람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바닥층의 지지가 탄탄하다. 에르도안의 이슬람 민주주의는 약자와 빈자를 먼저 보살피는 것이 이슬람주의 정당으로서 왕도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슬람 세계 왕정국가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슬람 민주주의가 다른 시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이슬람 세계인 중동은 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동아시아가 가장 중요하다. 중동에 관여를 계속해도 사태가 개선되기 힘들다. 고로 미국은 중동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독트린을 선언했고, 이런 정책 기조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미래 전망

   중세 유럽을 깨운 역할을 했던 이슬람 세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는가?

   서구사회에서 크리스트교의 교세가 약화하고 있어서 이슬람이 21세기 최대종교가 될 수 있다. 이슬람에서 칼리프는 영토의 지배자로 그치는 개념이 아니라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 ‘움마’의 정치적 지도자다. 이슬람법에 의하면 대통령이나 총리는 규모가 큰 ‘부족장’에 해당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차원에서 2016년 알-자지라 방송이 아랍 세계 9개국 대상 여론조사 결과 이슬람법(샤리아)이 국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50~70%가 지지했다. 이는 반수 이상이 재이슬람화에 수긍한다는 의미다. 이슬람을 종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이슬람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이라는 미국의 시각도 바르지 않다. 자유 세계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이슬람에서 원리주의란 ‘움마’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 프로젝트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크리스트교는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공통점은 아주 많다.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이슬람과 서양사회의 크리스트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찰이 생긴 것일 뿐 결코 문명의 충돌로 보는 새뮤엘 헌팅턴의 시각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에서 만든 것이다.

   지역전문가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개방적인, 그래서 아시아에서 새로운 부국으로 성장하리라 예측한다. 쇠락하는 프랑스어보다는 이슬람 문명의 보편어인 아랍어가 세계어로서의 위상을 누릴 날이 머지않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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