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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08. 2023

모든 진실은 연속된 오류의 수정이다 1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다섯 번째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다섯 번째(12,000자)



   

   책 읽기를 좋아하니 이런저런 책이 눈에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지적 호기심이 생겨 읽은 책과 관련 있는 책을 찾게 된다. 내용이 전문적인 책은 지엽적일 수 있어 관심 영역을 넓히기 쉽지 않지만, 일반 상식 수준이라면 넓혀가기 쉽다. 박학의 기쁨, 넓게 아는 즐거움이다. 역사 영역 책을 읽으면, 새로운 역사적 사실과 배경, 인물을 만나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된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를 재구성하니, 역사는 매일 연구자에 의해 새롭게 쓰임을 알겠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갑진 왜란과 국민 전쟁>, <고종 시대의 재조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한국 역사를 다루며 학교에서 다루지 않은 진실을 발굴한다. 왕조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저자의 관점에 따라 문제의식을 해결하려는 연구 결과물이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일본사>는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역사문제의 귀결인 반일감정을 한쪽에 치워두고 있다. 에도 막부의 성장 배경을 재미있게 풀어놓는다. <제국의 폐허에서>는 20세기 초 아시아 여러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국제정세를 어떻게 파악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관점을 만날 수 있다.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라 새롭고 신선한 내용이 적지 않다. <미국, 제국의 연대기>와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는 20세기 이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성장기와 전망을 담고 있다. 언급한 책들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각각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내용과 영향은 어떠한가 살펴본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직지심체요절은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으로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다. 우리는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금속활자가 미친 사회적 영향을 언급하는 일은 드물다. 금속활자는 직지 외에 어떤 책을 얼마나 인쇄했고, 어떤 역사적 역할을 했는지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는 문제의식은 강명관이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를 쓴 까닭이다.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책 속에 가두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해방한다. 조선의 사대부가 책으로 만들어졌고, 사대부를 만든 책이 담고 있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조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교육과정을 편성할 때 구체적이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 혹은 부끄러운 부분이라는 이유로 중등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내용 몇 가지를 골라본 것이다. 

처음부터 한글로만 쓰인 책을 찍기 위해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지 않았다. 조선 후기 서민 문학작품은 대부분 필사본이었다. 조선은 교서관(校書館)이나 지방 감영 등 국가 기관을 통해 책을 인쇄하고 유통하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조에는 사후 간행된 문집 2,300부를 친지에게 나누어 주는 수준에 머물렀다. 조선에는 출판업자가 없었고 상업적 출판은 20세기 초에 나타난다.

문인과 지식인들이 읽은 책은 중국의 책들이었다. 조선 저자의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 성조 때 편찬된 <사서대전>, <오경대전>은 세종 때 수입된 이후 조선에서 사서오경의 독점적인 판본이 되었다.

조선의 독서 문화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붕괴하였다. 언문일치운동으로 막대한 양의 책이 폐기되거나 일제 강점기에 해외로 반출되었다.

계미자는 하루 10장 미만, 경장자는 20장, 갑인자는 4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갑인자는 조선의 대표 활자다. 당시 중국은 비용 탓에 목판으로 회귀하였고, 일본은 금속활자를 몰랐으니 조선이 최고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조선 활자는 대략 10만에서 30만 자로 금속활자는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조광조는 모든 개인이 도덕적 인간이 되는 이상 사회를 추구했다. 이를 실현하려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여씨향약>, <열녀전> 등을 보급하였다. 이 윤리 서적은 <소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현재 <소학>은 인간의 일상과 일생을 구체적으로 제약한 규범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임진왜란 기간 경복궁이 불타고 고려의 전적과 조선 건국 후 200여 년 동안 생산된 문서가 타버렸고, 전국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많은 목판도 같은 처지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20권으로 모든 분야를 담고 있다. 책은 3,435 조목, 등장인물 2265명, 서적의 저작자 348명을 포함한다. 베트남, 라오스, 타일랜드, 자바,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 30개 아시아 국가와 포르투갈,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소개한다. 이전의 한국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저작은 없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과거시험 공부를 위한 학문이 사람의 본성을 해친다’. ‘시, 부 등 문장으로 국가 경영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잘못이다’. ‘서울과 시골의 문화적 불평등이 권력의 불평등이 된다’. ‘혼인으로 당파를 형성하는 고질병은 명철한 임금도 어쩔 수 없다’. ‘노비제도 폐지’. ‘재물은 노동의 대가여야 한다.’는 등 현실에 기초하면서도 혁신적인 생각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사실과 함께 아쉬운 점도 있다.

   정조는 북경에서 수입된 책이 조선 지식인을 오염시키고 주자학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서적 수입금지령을 내렸다. 당시 북경에는 수 만권을 갖춘 대형서점이 11개나 있었으나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고, 서적 거간꾼인 서쾌만 존재했다.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다산 정약용의 여러 저술은 당대에 인쇄되거나 보급되지 못했다. 1900년에야 인쇄하여 발행됐다. <여유당전서>는 1936년에야 출판됐다. 이에 견주어 17세기 이후 일본의 200여 개 출판업자가, 18세기 중반에는 연간 1000여 종 신간이 출판문화를 이끌었다. 에도시대에 일본에는 서점이 많아 서적의 거래가 활발했다. 일본의 근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문화의 축적이 서구의 근대 문물 수용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란 판단은 신상목의 견해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을 읽으며 현재와 연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이두를 연구하려면 이두로 구결을 소상히 달았다고 하는 <대명률직해>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조선 태종 때 목활자로 인쇄되었다. 양주동 이후 이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이 남아있는지 알지 못한다. 

   한국 여성들의 억울함 시원은 조선 조광조의 의식에 있다. 고려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남성과 여성의 상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소학>의 규범이 인간의 생활을 제약했다는 저자의 비판적 견해에 대부분 공감한다. 우리 앞 세대가 <소학>의 가치를 재평가해 일부라도 실천하고 가르쳤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소학은 눈을 뜨면 침구를 정리하고 청소하라고 가르쳤다. 

   퇴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 것은 책을 읽는 기쁨이다. 하나의 완성은 나머지의 배제일 수 있다. 율곡의 <격몽요결>은 개인이 살아가는 태도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 대한 평가에서 오늘날 독서가들이 가야 할 길을 본다. 독서에서 박학의 기쁨을 느끼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활용돼야 한다.

   <이탁오 평전>을 읽은 것이 조선 후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넓게 읽어야 겹치는 부분이 생기는 거다. 

   이덕무의 독서는 내가 어려울 때 힘을 내게 하는 인생의 데카르트 좌표 역할을 해냈다. “교과서는 인간의 지식을 제한하는 감옥이다.”라는 저자의 격한 표현은 교과서란 지식 일부이므로 평생 공부하여야 하는 것으로 바꾸어 받아들인다. 

   신채호가 남과 북에서 인정받듯이 어떤 이데올로기든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힘쓴 사람들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일본에 빌붙어 호가호위한 이들과 역사를 왜곡한 이들에게는 그에 맞는 평가를 하는 것이 한 단계 도약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의 저자가 가진 문제의식은 한국사가 의병 투쟁을 ‘구한말 의병 투쟁’으로 축소하여 다룬다는 점이다. 역사 교과서가 고종이 의병활동을 전개하라는 밀지를 내렸다거나, 외국이 이를 전쟁으로 본다는 사실을 기술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도 볼 수 있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은 황태연이 시도한 이름 짓기라, 책을 읽는 누구에게든 익숙하지 않다. 책을 읽기 전에 용어 정의가 필요하다. 

갑진왜란 : 일본이 1904년 2월 6일부터 2월 20일까지 진해만, 마산포, 인천항, 서울을 무력점령하고 남양(화성) 해안, 군산, 원산, 진남포 등에 4만 5천 명의 병력을 침투시켰다. 이를 저자는 갑진왜란으로 정의한다.

우리에게 갑진왜란이 생소한 까닭은 일제가 3일 뒤(1904.2.9.)에 일으킨 러일전쟁 때문에 가려졌고, 또 일제 치하 일본 역사가와 친일역사가들이 감추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왜란이 1차 침략전쟁이고, 갑진왜란은 일제의 제2차 침략전쟁이다.

국민전쟁 : 러시아군의 패배와 포츠머스 조약 조인(1905년 9월 5일)을 전후해 일제가 일진회 등을 통해 을사늑약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고종은 최후의 항전을 시작하는 ‘국민군’ 거의 밀지를 내리기 시작한다. 고종의 ‘국민 전쟁계획’에 따라 고종의 거의 밀지 발령에 따른 지방 의병의 봉기로 시작되어 해산된 군대와 함께 전쟁을 치렀다. 저자는 이 과정을 ‘국민전쟁’으로 정의한다. 외국 신문들은 이를 ‘한국전쟁’으로 보도했다. 

북방과 간도에서 의병 투쟁이 가열된 것은 3만 대한 제국군의 의병화와 이 과정을 정당화해 주는 고종의 거의 밀지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연해주에서 이범윤 의병부대, 해조 신문의 창간은 고종의 밀지와 내탕금으로 이루어졌다.

국민 전쟁을 총괄 평가해 보면, 일제 측의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4년간 국민군이 치른 전투는 총 2,852회, 국민군 병력은 총 14만 1,815명에 달했고, 1만 7,840명이 전사했다.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 따르면, 거듭되는 고종황제의 반항적 계획에 분노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시의(侍醫)인 안상호에게 독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고종 독살 후 관련 지밀나인, 숙직자 등이 소리 없이 제거되지만, 안상호만 승승장구했다. 고종의 독살을 알게 되자 3.1 만세운동으로 발전한다.

상해임시정부의 분열, 일제의 만보산 사건 날조로 한중관계의 파탄지경에서 헤어 나와야만 했다. 김구는 이 같은 존립위기의 돌파를 위해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고 의열투쟁을 실행한다. 이봉창의 동경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해 의거가 정점에 있다. 윤봉길 의거는 국제적으로 보도되었고, 국내외 항일투쟁과 항일 투지 의지가 급상승하는 계기가 됐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의 대한(對韓) 감정이 급격히 호전되었다.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은 한국의 독립지원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중국군 중앙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설치하여 1기에 군관 100명씩을 양성하기로 하여 1935년 4월 62명의 한국군 장교를 배출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하자 1940년에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군 일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이후 중국과의 교섭을 통해 1944년 임정 직속 한국광복군으로 전환했다. 1942년 광복군과 기타 항일유격대의 인원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임정은 중국 정부와 동맹외교를 강화해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에 한국 자유 독립 조항을 쟁취 냄으로써 한국의 광복을 국제적으로 확정 짓는다. 카이로 선언의 특별한 점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거나 점령된 다른 나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나 한국만 두 번이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점이다. 

장개석과 중국 정부의 기본입장은 미국, 영국 등과 달리 ‘한국의 즉각 독립’이었다. 재중한인들과 중국여론의 압력이 있었고, 한국광복군이 대일심리전에서 한적(韓籍) 일본군을 끌어내 일본군 전선을 와해시켰다. 한반도에 소련이 야심을 가질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1945년 11월 4일 장개석의 일기를 보면 한국 독립에 대해 순수하고 진실한 태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한국혁명 단원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국민 혁명사의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뜻을 이루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루속히 한국의 독립이 완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의 연구는 학교 교육에서 듣고 보지 못한 역사적 사실과 합리적 추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아관망명은 왜군과 친일괴뢰들에 생포되었던 임금이 침략 왜군에 대해 본격적인 항쟁을 전개하기 위해 경복궁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고, 전광석화처럼 친일괴뢰 정부를 전복시킨 전대미문의 정치혁명이다. 

제2차 반탁투쟁은 김구가 1945년 12월 여차하면 미 군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체하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회의를 소집해 임정의 지휘 아래 이승만과 연합해 범국민적인 투쟁을 벌여 승리한 거다.

몇 달씩 하지의 미 군정은 식민 통치를 연장해 보려고 남아있던 일본인 고문관을 임명하고 이들의 꾀에 놀아났다. 이들을 일본으로 몰아낸 것은 미군이 아니라 해외에서 막 돌아와 미 군정의 이 황당한 작태를 보고 기가 막혔던 독립투사들이 일본인 고문관을 하나씩 사살하기 시작한 왜인 처단 작전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영광의 상징이다. 더구나 망명정부가 ‘광복군’이라는 군대를 가졌다는 사실은 1940년대 당시에 세계적인 뉴스거리였고 외교력을 급격히 높여주었다.

1894년 8월 9월 초순쯤 전봉준과 동학 지도자들이 고종에 의해 내려진 거의 밀지를 받고 거의(擧義)한 제1차 동학 농민 봉기군을 비롯한 1894년 이래의 모든 의병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일어났는데,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도 마찬가지다.

고종은 러일전쟁에서 전시중립을 선언하였다. 이는 러시아가 패전하고도 배상금을 물지 않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한국의 국외중립 지위를 침해한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러시아가 물고 늘어짐으로써 가능했다. 이로써 일본에서는 국제적 강도질로 일확천금을 꿈꾸던 일본인의 봉기로 가쓰라 내각이 붕괴하였다. 

폐위된 고종황제의 거의 밀지는 의병장 이강년, 관동창의대를 결성한 이인영에게 내려졌다. 1909년까지 연전연승하던 국내 의병들은 1910년부터 총기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장이나 그 수가 태부족해졌고 탄환마저 고갈되어 전투할 수 없었다. 점차 북상해서 만주로 투쟁거점을 옮기게 된다.

고종은 연해주 망명정부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하였으나 국제정세가 러일 간의 접근으로 변화함에 따라 좌초되었다. 이후 고종은 이회영의 기획에 따라 북경 망명계획도 추진하였으나 독살로 무산된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시행한 것이라는 합리적 논거를 바탕으로 추론한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 밝히는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 한다.

   갑진년 일본군의 진주에 대해 서울 개화 지식인들은 환호했다. 황성신문과 거의 모든 언론이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주의적 동양 평화론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며 러일전쟁의 개전을 환호해 마지않았던 서울 개화 지식인들의 기본정서였다. 개전 초에 민족주의적, 애국적 신문들은 일본을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 황인종의 지도자요 방어자로 환영했고, 일본의 보호국 설치 후에야 깊은 좌절을 표출한다. 황성 신문사 사장 남궁억, 윤치호, 유길준, 김윤식 등 우리 국사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러했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에 대하여 1907년 7월 6일 어전회의에서 친일파 대신 송병준은 고종이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하세가와 주둔군사령관에게 사죄하라고 2시간 동안 고종을 핍박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앞장서서 황제의 폐위를 추진했다. 

   유림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3.1 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교도수가 300만에 달했던 천도교가 민족 대표 중에서 가장 많았고, 자금 동원, 기미독립선언서 인쇄와 살포, 태극기의 제작과 보급, 만세운동의 조직화와 전국적 확산 등에서도 주도적이었다. 여전히 성리학에 빠져있던 당시 유림은 소위 황도유학(조선유교연합회가 내세운 것으로 천황이 정점에 있는 神道가 유교와 결합한 충효일치의 일본화된 유교를 말한다)에 가담해 거의 다 친일화 되어 3.1 운동을 멀리했다. 친일화 되지 않은 소수의 잔존 유생들도 이단 쌍놈들(동학, 크리스트교도들)의 주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동학, 크리스트교도 측 민족 대표들의 연락을 받고도 이들의 가담요청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33인 민족대표단에는 단 한 명의 유생도 참여하지 않았다.      


   중요함에도 역사가 소홀하게 다루는 국제관계가 보인다. 

   다음은 2차 대전 중 중국과 미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미군 폭격기가 일본을 폭격한 후 연료가 떨어지면 발진 항모로 귀환하지 못하고 중국에 낙하해 귀환하는 순환 작전을 해야 했다. 여기에 중국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미국은 중국에 군사, 재정적 지원을 한 것이다. 중국군의 대일전쟁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는 광복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대상으로 심리전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한중군사동맹과 김구 주석을 중시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의존 관계 때문에 한국의 자유 독립에 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를 직설적으로 대변하는 장개석 총통의 주장을 루스벨트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 선언의 수훈자가 이승만, 홉킨스, 루스벨트가 아니라 윤봉길, 김구, 장개석이라는 이승만 자신의 글을 포함한 명확한 사료들이 있다고 한다. 

   고종은 조미 수호조약 제1관을 근거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불공정 대우와 억압 사실을 통지하고, 간절히 거중 조정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외면한다.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조약 의무를 위배하면서까지 한국을 외면하고 영일동맹을 맺어 등 뒤에 칼을 꽂았다. 

   ‘강박에 의한 계약은 무효다’라는 원칙은 사법과 국제공법의 공통된 원칙이다. 국제사회에서 을사늑약과 미국에 의한 아이티 강압 조약 사건을 강박에 의한 조약의 원천 무효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프랑시시 레이라는 학자는 이외에도 한국과 맺은 일련의 조약에 의해 짊어진 한국 독립 보장 의무를 위반한 두 번째 이유에서도 을사늑약은 무효라는 입장이다.     

 

고종시대의 재조명

   황태연의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읽고, 구한말의 역사를 더 알고 싶어 연구 성과를 검색한다. <고종 시대의 재조명>은 구한말 가려진 진실을 들추어낸다. 읽는 과정에서 신문기사와 페이스북에서 논란을 마주한다. 저자는 한때 국사편찬위원장이었다. 보수 정권에서 위원장이었기에 진보정권에서 비난을 받은 듯하다. 보수든 진보든 역사를 제대로 드러내고 해석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구한말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정치지도자의 무능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에 있다. 해답으로 일본은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의 무능과 무기력을 강조하여, 망국의 원인을 전적으로 한국의 내적 결함에 돌려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다고 파악하였다. 일본 침략주의에 따라 조장된 것이다.

   이를 증거가 되기 위해 연구하고 드러낸 진실은 다음과 같다.

구한말이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펴는 은둔 국가라는 인식은 아마추어 서양 역사가의 편견과 일본 침략주의 책략이 만들어낸 결과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을 통해 자력으로 근대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대로 두면 한반도 장악(정한론)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둘러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군사력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침탈하기 시작했다. 

불편한 진실은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 만민공동회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 공사관이 대한제국 황제권을 약화하려 독립협회 지도부의 일부 친일분자들을 사주하여 일으킨 소요의 성격이 있다.

동학혁명 당시 청군 출병은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보고 겁을 먹은 국왕이 요청한 것이 아니다. 위안스카이가 반청 감정이 거세지는 조선에서 민중을 제압하기 위한 목적과 내정간섭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요한 것이다. 

고종황제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개화를 추구한 개명 군주다. 청이 속국화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도 고종은 지식과 정보의 수집을 위해 중국 상해로부터 3만여 권의 서적을 사 집옥재라는 고종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1896년 아관파천 후 대한제국 출범을 앞두고, 황성 만들기 사업으로 서울의 근대적 도시 개조사업을 추진하였고, ‘익문사’라는 통신사를 가장하여 비밀 정보기관을 운영했다.

  <고종 시대의 재조명> 저자가 내재적 발전을 주장한다는 부정적 인식과 친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종 시대를 재조명하여 드러낸 진실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사람이 세상을 망치는 것처럼, 읽지도 않고 반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는 않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책을 읽고 독서 노트를 쓰는 까닭은 책이 하는 말을 요약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기억하여 읽은 책들에서 계통을 세우고 나의 관점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보기 드문 책이다. 김건우가 ‘문학은 일반의 통념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라고 밝힌 국문학자가 쓴 역사책이다. 20개의 주제로 꾸민 책은 인물 중심으로 풀어간 역사서라서 평전 냄새를 풍긴다. 몇 가지를 살펴본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학병으로 일제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중국 임시정부로 가 광복군이 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진입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다가 해방을 맞는다. 

월남한 30대 지식인들이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해 지식인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고, 1950~19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 탱크 역할을 했음을 다룬다. 조선왕조 내내 차별받던 서북지역에 구한말부터 미국 선교사의 의료와 교육활동을 통한 미국화가 진행되었고, 월남한 이후 반공, 친미, 보수 세력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서북지역 청년들이 제주 4.3 사건에서 행사한 폭력의 뿌리를 본다. 안창호는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언사에서 서북파와 기호파 간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백낙준은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 교육 이념의 근간이 된 ‘홍익인간’을 만들어냈고, 문교부 장관으로 도마다 국립대를 두는 방식을 시행한다. 사상계사는 진단학회, 국어국문학회, 한국철학회의 학회지를 발행하여 문·사·철을 아우르는 허브 역할을 했다. 서북 출신에 편중된 사상계 그룹은 최초문학상인 ‘동인문학상’을 만들고, 중국 《신청년》에 견줄만하다고 자평한 《사상계》를 발간하였다. 서구 자본주의의 경험을 따르면 선진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는 로스트의 근대화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등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들이 기반과 방향을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5·16 이후의 경제개발계획은 쿠데타 세력이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범부와 박종흥의 ‘국가주의 철학’은 화랑도와 신라정신을 찾아내 애국을 강조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환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 데는 독일 철학의 영향이 있었다고 밝힌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국가주의 철학에 저항하였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해방 후까지 크리스트교의 분파를 설명한다. ‘선교 지역 분할 협정’에 따라 서북지역은 미국 북 장로가, 함경도와 간도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선교한 지역이다. 서북지역은 평양 신학교와 미국 북 장로교 계열 교회들로 1953년 전국 크리스트교 총 교세의 삼 분의 이에 이르고 이후 예수교장로회(예장)를 형성한다. 함경도와 간도 지역의 교회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지원의 받아 기독교장로회(기장)로 훗날 한신 그룹으로 발전한다.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통계로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방기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극좌와 극우는 ‘한 줌’에 불과했다. 1946년 여름 미 군정청에서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나라 만들기’의 과제와 관련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원한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14%(1,189명), 공산주의 체제 선호자가 7%(574명)였음에 비해 사회주의 체제를 바란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0%에 이르는 6,237명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대중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 이념으로 이해했던 듯하다.”     


   결론으로 한국 우익의 기원을 밝힌다. 한국의 정통 우익은 김준엽으로 친일 하지 않은 학병 세대다. 김준엽이 임시정부 환국 때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중국을 공부하고, 고려대에서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총장을 역임하며, 오늘날 한국의 학계에서 중국 연구는 사실상 김준엽이 기초를 모두 놓았다고 평가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 개정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는 문장 명기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한 ‘정통 우익’ 다운 역사 감각이 있었다. 

   대한민국 설계자들은 친일로부터 자유로웠으나 일본 제국에서 교육받은 세대들이다. 또한, 건국과 전후 국가 재건과정에서 미국이 끼친 절대적 영향력을 생각할 때, 서북지역 월남 지식인들과 크리스트교인들이 대한민국 설계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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