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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08. 2023

모든 진실은 연속된 오류의 수정이다 2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다섯 번째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다섯 번째(9,000자)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일본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일본사>는 저자가 근대화 이전에 일본과 조선이 비슷했을 거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어떤 차이가 있었겠느냐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써낸 글이다.

   천하 보청과 참근 교대제를 에도시대를 이끌어간 막부 권력의 원천으로 파악한다. 천하 보청은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를 말한다. 성곽 축조, 운하망 건설, 하천 정비 및 농수로 건설, 중심도로 확충 등 인프라 건설에 다이묘는 인력과 자제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쇼군은 다이묘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는 없었지만, 천하 보청을 통해 다이묘를 견제한 것이다. 천하 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의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 때문에 관리 비용 등 매몰 비용이 착복이나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천하 보청의 역무에 납기를 맞추지 못하거나 부실한 다이묘는 영지를 뺏기거나, 황무지로 옮겨가라는 명령을 받아야 했으니 최선을 다해 인프라 건설에 참여해야 했다.

  참근 교대제는 근대화를 예습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이묘들은 에도성에 번 저(번의 업무를 보는 저택으로 번에서 비용 부담)를 두어야 했다. 1년을 단위로 각 번의 번주를 정기적으로 에도성에 나와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제도다. 100명에서 500명 이상의 인원이 수백 킬로미터 거리를 이동해야 했는데, 제반 비용을 독자적인 번의 징세권을 갖고 있던 다이묘들이 전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게다가 에도 체재비를 더하면 참든 교대에 드는 비용이 다이묘 세수의 절반이 넘는 막대한 액수였다고 한다. 전국 270여 다이묘들이 이동과 에도 체재에 쓴 경비는 부의 환류와 경제 활성화에 직접적이고 확실한 효과를 보였다. 이에 따른 화폐경제의 확산과 대상인의 활약, 서민사회의 성장에 이바지하였다. 더구나 에도와 지방이 연결된 전국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인원, 물자, 정보가 모이고 흩어지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참근 교대제는 우키요에의 확산과 여행에 미친 영향 정도만 아는 수준을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으로 메이지유신 이전의 에도시대는 “역사,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여러 방면에서 정보의 습득과 실생활에서 응용을 통해 형성된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스키마가 근대화 시기 일본 사회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쉽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제국의 폐허에서

   타지에서 독특한 레시피로 만들어낸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한 여행이다. <제국의 폐허에서>가 보여 준 책 읽는 맛이 그렇다. 그 맛은 익숙한 맛이 아니라 새로운 맛이다. 물론 쓴맛도 있다.

   책은 현대 세계의 모습을 1905년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있었던 러일전쟁으로부터 그려낸다. 서구의 대표로 나선 러시아와 동양의 대표인 일본이 싸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본 승리에 서구 세계가 정신적 혼란에 빠진다. 백인종이 무지몽매한 흑인, 황인종을 가르치고 깨우쳐 문명 상태로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며, 이는 ‘백인의 짐’이란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루스벨트, 인도 총독은 놀랬고 무스타파 케말, 자와할랄 네루, 타고르, 쑨원은 기뻐했다. 일본의 승리에서 오스만제국, 이집트, 베트남, 페르시아, 중국의 신문은 추론에 들떴다. 세계 어디서나 식민지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가 가진 심리적, 도덕적 함의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이슬람 나라의 학생들은 일본의 진보한 힘을 배우러 일본으로 향했다. 중국, 베트남, 인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저자 판카지 미슈라의 눈에 유럽은 쓰시마 해전과 1차 대전에서 대학살을 자행하여 도덕적 위신을 대부분 잃어버렸다고 본다. 게다가 2차 대전 중 아시아를 정복한 일본이 기진맥진한 유럽 제국들의 손아귀에서 아시아를 떼어내는 일에 일조했다고 해석한다. 우리에겐 불편한 해석이다.

   20세기 역사를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으로 규정하는 유럽인과 미국인에 반하여, 아시아가 지적,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판카지 미슈라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구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 아시아의 사상가,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이 책의 두 주역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 사상가 겸 활동가다. 먼저 자랄 알딘 알아프가니(1838~1897)는 19세기 후반 중동과 남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언론 활동과 정치적 권고에 주력한 이슬람이다. 또 한 명은 현대 중국의 가장 두드러진 지식인 량치차오(1873~1929)인데, 그는 오랜 제국의 확실성을 무너뜨린 여러 사건과 중국이 온갖 참상을 겪은 뒤에 세계의 주요 열강으로 다시 부상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현대 초기의 이 두 아시아인은 아시아 전역에서 서구와 서구의 지배를 향한 분노, 조국의 무력함과 쇠퇴를 근심하는 마음이 대중의 민족주의적 해방운동과 야심 찬 건국 계획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선두에 서 있었다.

   몇 가지 차원에서 지적 호기심은 배우는 기쁨을 준다.

   첫째, <제국의 폐허에서>는 19~20세기 영국, 미국이라는 서구 강대국의 시각에서 세계를 인식하도록 가르치고 배워왔던 기성세대에게 새 지평을 안내한다. 인도 사람 판카지 미슈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한다. 물질을 중시하는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정신도 중시하는 중국과 인도, 이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둘째,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로 지식정보사회를 예견한 것처럼,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량차오, 타고르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 19~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말로를 예견했던 사상가들의 삶을 통해 21세기를 예견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이미 황태연의 <갑진왜란과 국민전쟁>과 같은 국내 서적에서도 언급하는, 드러내기 껄끄러운 내용을 알려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대한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반응은 ‘환영’과 ‘주목’이었다. 동양이 서양을 꺾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일부 지식인들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일제 식민지 역사를 경험한 대다수 우리에겐 공감할 수 없는 불편한 이야기다. 

   넷째, 경제학자였던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을 내게 된 배경에 물질주의의 만연, 1차 대전 이외에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섯째, 국사 교과서는 중국의 5.4 운동이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운동이라고 가르친다. 대한제국의 3.1 운동이 동양 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이다. 책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중국인들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중국의 요구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의 반환 등 중국의 요구가 무시됨에 따라 실망한 것이 기폭제였음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내 이름은 빨강>을 쓴 오르한 파묵은 평가한다. ‘판카지 마슈라는 이 책에서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터키에서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의 사람들이 겪어온 근대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서구의 오래된 동양관을 전복시킨다. 오늘날 분노하는 아시아인의 할아버지 세대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서 시작하는 서양 고대 문명부터 세계사를 풀어간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 세계사다. 게다가 짙게 밴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가르치고 배운다. 중국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중 있게 다룰 뿐이다.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비중은 비중이랄 것도 없다. 특히 중앙아시아(오늘날 중앙아시아라는 지리적으로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을 말한다)에 대한 언급은 스키타이 문화, 흉노의 이동로, 훈족, 타타르를 제외하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몽골의 침입을 겪은 유럽의 황화(Yellow peril)란 것도 교과서보다 책을 읽어 얻는다. 그만큼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 수 없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중앙 유라시아가 차지하는 역사성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김호동은 책에서 중앙 유라시아라는 지역을 재설정한다. 서쪽으로는 흑해 북방의 초원에서 동쪽으로는 싱안링 산맥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부 산림지대로부터 남쪽으로는 힌두쿠시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다. 이곳의 역사를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에 담았다. 

   인류는 수렵과 채집의 단계에서 농경과 목축 단계로 이행하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를 통해 목축단계의 유목민이 고대부터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를 주도했음을 밝힌다. 톈산산맥 주변에 준가르라는 나라를 끝으로 유목민의 시대가 끝나고 정착민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과정까지를 연구한 것이다.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를 간단히 풀어보면,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스키타이와 흉노가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정착 농경민과 관계를 맺고 동서 문명 교류에 역할을 한다.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투르크인들이 중앙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했고 중심지가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으로 포위된 지역)지역이다.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몽골이 떨치고 일어나고 쇠퇴하는 시기다. 거란(요), 여진(금), 몽골과 울루스(교과서에서 차가타이한국, 오고타이한국 등 칸국으로 다룸)에 대해 기록한다. 몽골 이후의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중앙 유라시아사에 모굴 한국과 티무르제국, 수피 교단, 티베트 불교가 흥망성쇠를 경험한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에  청의 건국, 러시아와 청의 외교교섭, 티베트를 둘러싼 준가르와 청의 각축, 카자흐지역의 러시아 복속, 한인 농민의 유목지역 정착, 청 말 한인 상인들의 몽골 진출, 청의 신강 지역 지배,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점령 등을 다룬다. 중앙유라시아가 청과 러시아라는 두 제국에 의해 완전히 분할되고 역사적 독자성과 동력을 상실한다. 야쿱 벡 정권과 몽골이 유목생활을 접고 정착하게 된 과정에서 청나라 농민과 상인의 역할이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가 밝히고 알리는 진실 몇 가지를 열거한다.

흉노는 몽골 고원에서 유목 생활과 기마 전투에 의존하던 국가가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농경민과 정착지를 포함하고 있었고, 문화적으로 중국과 유라시아 서부 지역과 다양한 문화적 접촉을 유지했다.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이 중국사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족 영역이 화이수이강 이남으로 축소되고,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무대가 북중으로까지 넓어진 시대였다.

돌궐과 투르크는 같다. <터키 민족 이천 년 사>에도 같다고 기술한다. 중국 내부에 영하회족자치구는 트란스옥시아나가 고향인 소그드인(중국 역사에 胡商으로 등장하는 국제 상인)들의 후예다. 안녹산은 사마르칸트 출신이다.

 금나라를 건국한 아구타의 선조들에 관한 기록인 <금사>에 함보라는 사람은 고려에 살던 인물이다. 고려란 사실 고구려를 지칭한다. 금나라가 화북에 진출하면서 낙양, 장안이 아닌 북경이 중국 역사에서 처음 수도가 된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가즈나 왕조, 중앙아시아의 호레즘 왕조, 인도 북부에 세운 델리 술탄국은 투르크인들이 노예의 신분에서 군사적 역량을 키워 만든 왕조다.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라틴아메리카의 아이티도 20세기에 노예 후손들이 세운 나라다.

북경을 여행할 때 가보는 만리장성은 사마대 장성이다. 알탄 칸의 북경 공격이 있고 나서 명조에서 엄청난 인력과 경비를 투입해서 세운 것이다. 당시 명의 몽골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 준다.

몽골이 라마교를 믿었다고 가르치는데, 라마는 인도의 구루(guru)를 티베트어로 옮긴 말이다. 티베트 불교는 라마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다. 티베트 불교라고 해야 한다.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는 톈산산맥과 타림분지 주변의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있었다.

과거 러시아는 카자흐지역이 러시아에 자발적으로 편입했다고 하였으나, 1770년대 푸가초프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카자흐 수령들이 난에 동조한 것으로 보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 <대위의 딸>은 푸가초프의 난이 배경이다.

몽골 유목민의 특성이 변질된 과정에는 청나라가 팔기제를 시행하여 지역 간 이동을 통제하고, 티베트 불교의 확산이 유목민의 군사력을 약하게(살생 금지)하고, 한인 상인자본이 몽골 유목 사회에 빈곤을 초래하였다.

신강지역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이 넓고, 인구 밀도가 낮은 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한인들은 대규모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청나라 후기 학자 ‘공자진’의 주장을 실현한다.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가 주는 매력은 칼라로 그린 지도다. 김호동 교수가 그리고, 전문 일러스트가 그린 것을 감수한 115장의 지도는 한국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지형도를 기반으로 역사적 사실과 경로를 표시한 지도는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하는 최고의 역할을 한다. 지리를 전공한 사람이라도 저자가 그린 성의 있고 수준 높게 그린 지도가 없었다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제국의 연대기

   대니얼 임머바르는 <미국, 제국의 연대기>에서 미국은 제국인가? 제국주의 국가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답을 찾아간다. 교과서는 제국주의를 강대국이 군사력을 이용해 약소국을 침략하고 약소국의 자원 일체를 수탈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냐는 물음에 누군가는 그렇다고 한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안과 밖에 존재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 등이 미국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탐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국은 교과서가 정의한 제국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미국, 제국의 연대기>는 제목에서 결론을 내고 있듯이 제국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영토를 지배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원을 수탈하고 원주민을 억압하던 제국은 아니다. 이런 유형의 제국주의는 2차 대전까지가 유효 기간이었다. 그러면 왜 저자는 미국을 제국이라고 판단하는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들을 살펴본다.

   해조분은 새똥이다. 화학비료가 나오기 전에 토질 개선제로 사용했다. 질소가 부족한 북미 농지에 해조분은 기적처럼 생산량을 늘려주었다. 영국과 페루가 세계 해조분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1856년 해조분 관련법 이후 미국 시민이 없는 무인도에서 해조분을 발견할 때마다 해당 섬은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미국에 부속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카리브해와 태평양의 수많은 섬은 해조분 탓에 미국이 소유권을 주장한다. 화학비료의 생산으로 해조분의 역할은 사라졌지만, 이 섬들이 미 제국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전 세계의 반제국주의적 저항은 식민지 유지 비용을 높였다. 새로운 기술은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도 제국의 이점을 누릴 수 있게 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천연고무를 합성고무로 대체하여 동남아시아의 중요성이 낮아졌다. 견사, 삼, 황마, 장뇌, 목화, 양모, 제충국, 주석, 구리 동유 등을 합성 물질로 대체했다. 미국 경제 전반에서 식민지의 역할을 화학이 대신하게 되었다. 특히 플라스틱의 영향력이 컸다. 1940년대에 시작된 합성 혁명으로 원자재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식민지 건설의 이점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됐다.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 미국은 군수품 조달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절감한다. 항공기를 이용한 군수품 공급을 시도한 맥아더는 태평양에서 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활용하는 ‘건너뛰기’ 전략을 사용한다. 항공술과 마찬가지로 무선은 공간을 건너뛰는 기술이었다. 미국이 전 세계에 건설한 수천 개의 기지는 무선 기술이 없으면 운영할 수 없다. 영국은 식민지를 해저 케이블로 연결했지만, 미국은 무선 통신을 사용했다. 항공술과 조립식 배송 방식, 무선 통신, 암호화 기술, DDT, 어떤 환경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술은 함께 사용하며, 관할권이 없는 외국 영토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영토를 대체한 셈이다. 

   미국이 제국이 되도록 한 중요한 요인 중 중요한 것은 산업 ‘표준’에 관한 것이다. 후버는 나사산의 세계 표준을 만들어낸다. 이 표준은 조용히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영국도, 프랑스도 전쟁 중이라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선진 공업국 경제 생산의 60%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미국은 표준화의 중심으로 입지를 굳혔다. 국제표준음, 항공업계 표준어가 된 영어, STOP 표지판도 미국의 힘이다. 

   2차 대전 덕분에 미국은 해외에 2,000개가 넘는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미국은 식민지를 점령할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미국의 이익과 세계 평화를 최대한 지키는 데 필요한 군사기지는 유지”하겠다는 트루먼의 발언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방식을 알 수 있다. 

   세계를 연결하는 해외 기지의 형태로 제국은 여전히 존재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해외 기지는 합쳐서 13개, 러시아는 9개, 미국은 약 800개에 달한다. 수십 개 국가에서 미군 기지를 수용한다.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도 미군 기지에 둘러싸여 있다. 그중 여러 개는 해조분 섬이었다. 19세기 해조분 열풍은 미국의 해외 제국 전체의 기반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화학을 기반으로 한 합성기술, 항공기술과 무선 기술, 미국이 주도하는 산업 표준화, 해외의 미군 기지는 미국을 제국으로 존재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는 석유 수입이 필요 없게 된 미국의 정책 방향의 변화를 그린다. 석유가 필요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의식에서 미래를 전망하고 방향을 찾으려 한다. 

   1973년부터 2007년까지 자국의 석유 수입을 위해 석유 시장의 안전과 유통망을 관리하던 미국이 흥미를 잃고 있다. 2007년~2014년간에 셰일의 에너지 특성과 미국 셰일 산업의 진화로 미국의 에너지 체계를 변화시켰다. 미국은 더는 페르시아만에서 석유를 수입하지 않아도 된다. 셰일의 등장은 ‘구세계의 종언’과 미국의 전략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게 되고, 유럽과 러시아의 가상전쟁,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가상전쟁, 동북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 타이완의 석유를 둘러싼 각축을 예상한다. 미국의 가용 수단을 살펴보고, 동남아시아와 중남미가 여러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개편될 새로운 세계에서 낙관적이라는 미국의 시각을 보여 준다. 

   피터 자이한은 석유를 둘러싼 동북아 각축전에서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편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일본 편이 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 본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았고, 중국을 과소평가했다. 지정학적 평가는 지리학과 다른 각도에서 내리니 눈여겨볼 만하다. 페르시아만의 혼란은 석유를 100% 수입해야만 하는 한국의 에너지 구조를 생각할 때 뼈아픈 지적이다. 우리가 개척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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