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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드 Aug 28. 2023

우리 사이도 통역이 되나요? (1)

외국어 동시통역보다 훨씬 어려운 그것, 당신과의 대화

제발 저 인간 말 좀 해석해 주세요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답답함을 여러 표현으로 드러낸다.

당신이 무슨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하는 나름 냉철하고 정중한 문장부터

말이야 방귀야,

하는 이죽거림을 거쳐

헐, 왓(What)?

하는 외마디 비명까지.


스타일의 차이일 뿐 그 안에 담긴 절절한 메시지는 똑같다.


나는 A라는 말을 했으니 A로 알아들어줘.
알아들었다면 너는 B나 C로 반응하겠지.
그런데 왜 Z가 나오지??? 뜬금없이???

당황스러운 이 느낌에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다.


나는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이라 온갖 진상에 꽤 단련되어 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문화충격도 겪을 만큼 겪었다.

그런데도 매번 고구마 같은 대화에 가슴이 턱, 막힌다.

지구촌 인구가 70억 명이니 70억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 따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서 이런 절망을 안겨주는 대상은

현재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구사하며, 같은 장소에 있고,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공유해 왔으며,

심지어는 같은 호적에 올라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확률이 큰(!!)

아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


사무실에서는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성격이려니' 하는 수용과 체념으로 넘어갈 수 있다.

친구 사이라면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보네' 하는 역지사지와 배려로 감정을 다스린다.

편의점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만나는 불친절함도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흘려버린다.

그런데 그 모든 마인드컨트롤이 가까운 사이에서는 무력화되고 만다.

아, 나의 평정심이여.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밖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인데 집에서는 이래라저래라 할 때 빼면 입을 다문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툭툭 내뱉듯이 짜증만 내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가증스레 목소리가 돌변하는 배우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학교 친구들에게는 잘 보이려고 온갖 착한 척을 다 하면서
집에 오는 순간 가방과 함께 가면을 던져버리는 아이들은 또또 얼마나 많은가.


정말 서로 폭언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말이 통해야 좋게 말하지!


이런 합리화 속에 대화는 점점 산으로 간다. 정확히는 벼랑으로.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이제 막 나가자는 거야?" 파탄 대화의 6가지 특징


친밀한 관계에일수록 대화가 힘든 이유는 무얼까?

비폭력대화 전문가인 박재연은 저서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에 이렇게 설명했다.


툭 떠오르는 자동적 생각의 여섯 가지 패턴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서로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 대화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박재연 저, 한빛미디어 출간, 2010


여섯 가지 패턴이란 판단, 비난, 강요, 비교, 당연시, 합리화라고 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나 싶다.


1. 판단하기 : "그래, 넌 이런 인간이야."

2. 비난하기: "진짜 이기적이시네요."

3. 강요하기: "내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 안 했어?"

4. 비교하기: "다른 엄마들은 다 사준다고요!"

5. 당연시하기: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6. 합리화하기: "네가 열받게 했으니까 내가 소리를 지르지!"


... 이런 생각이 모두 '자동적' 패턴 이라니 오싹하다.


내친김에 곰곰이 나 자신의 '파탄 대화' 경험을 복기해 보기로 한다.

내뱉고 나서 후회했던 말, 들으면 열받았던 말을 하나하나 이 6가지 패턴에 대조했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중 가장 교묘하면서도 악독한 놈은 바로  '당연시하기'였다.


관계가 휘청거릴 때 가장 많이 들은 말도 "당연하지! 어떻게 그것도 모를 수 있어?!!"였고

가장 많이 한 말도 "어이없네. 그 (당연한) 걸 아직도 몰라?" 였던 것.

그나마 입 밖으로 내서 다툴 때는 괜찮다.
심각한 상황은 이 '당연함'이 한 사람의 마음에 불변의 진리로 자리 잡은 뒤 펼쳐진다.


난 너를 알아.


그 마음에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 바로 그때 말이다.



(2)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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